진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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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진(津)에 배속되어 진도선(津渡船)을 부리던 사람.
이칭
이칭
진간(津干), 진부(津夫)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고려 전기
공포 시기
고려 전기
시행 시기
고려시대, 조선 초기
폐지 시기
조선 초기(세종대)
시행처
고려 왕조, 조선 왕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진척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진(津)에 배속되어 진도선(津渡船)을 부리던 사람이다. 이들이 거주하는 진(津)은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 등과 함께 특수 행정 구역으로 분류되었고, 거주 이전의 자유 및 관직 진출이나 승려가 되는 것이 제한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특수 교통의 요지인 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진척 확보의 방안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진은 주현(主縣)의 통제를 받는 특수 행정 구역이었지만, 조선 전기에는 그런 모습이 사라지고 일부 주민들이 국역(國役)을 지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진(津)에 배속되어 진도선(津渡船)을 부리던 사람.
제정 목적

수상 교통의 중심이 되는 나루에서 관선(官船)을 부리며 관리들과 행인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하였다. 종전에는 부곡인(部曲人), 역자(驛子), 진척(津尺) 등이 고려 왕조 개창에 반대한 역명자(逆命者) 집단이라거나 형벌로서 그와 같은 역(役)을 맡게 되었다고 이해하였으나, 최근에는 그러한 견해보다 지리적 · 지형적 요인, 인구수의 부족 등으로 독립적인 현(縣)을 구성하기 어려운 지역의 사람들에게 특수한 역(役)을 부과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내용

고려시대에는 역참제(驛站制)가 시행되어 수도에서 지방까지 역로(驛路)가 개설되었다. 육로와 하천이 만나는 강이나 하천에는 진(津)을 두어 조정의 명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왕명을 받은 관리와 길을 가는 사람들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게 하였다. 진은 역(驛)과 함께 향(鄕), 소(所), 부곡(部曲)과 같은 특수행정구역이었으므로 주현(主縣)의 통제를 받았다. 진에는 진척 또는 진강정(津江丁)이라고 불리는 뱃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은 진리(津吏) 또는 진장(津長)이라 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본질적으로 양인(良人)이었으나 부곡민(部曲民), 역민(驛民)과 함께 일반 군현민(郡縣民)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따라서 진척이 일반 군현의 백성들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는 경우 그들의 자식은 진척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이들은 과거 응시와 입사(入仕) 및 승려가 될 자격이 없었는데, 그것은 모두 일정한 규모의 인원을 유지하기 위해 진에 강제로 거주하게 만드는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는 ‘간(干)’이나 ‘척(尺)’과 같은 칭호를 붙여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 또는 간척지도(干尺之徒)로 불렸다. 또한, 그들이 맡은 역이 일반 양인들의 역보다 힘든 천역(賤役)이었으므로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계층으로 간주되었다. 고려 후기에 들어 향 · 소 · 부곡의 해체와 함께 잡척(雜尺)이 지닌 신분적 제약도 많이 약화되었으나 진척은 여전히 존속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개국과 함께 대대적인 양인 확보책이 시행되면서 이들은 1415년(태종 15) 보충군(補充軍)에 입속되어 이전의 역을 면제받았으며, 제한적이나마 출사(出仕)도 할 수 있었다. 즉, 일정 기간 동안 보충군에 입역(立役)한 뒤 서반(西班) 대부(隊副)의 직함을 얻을 수 있었으며, 7품까지를 한품(限品)으로 하여 서용(敍用)될 수도 있었다. 이후에 이들의 역은 차출된 일반 민호(民戶)나 공노비(公奴婢) 등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때의 역은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천역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변천 사항

세종(世宗) 때에는 진간(津干)으로 바뀌었고, 세조 때에는 다시 진부(津夫)로 개칭되었다. 한편, 고려시대 이래 이들에게는 생계유지를 위한 재원으로 위전(位田)이 지급되었다. 고려 때의 지급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의 경우는 진부전(津夫田)이라는 이름으로 진부 1인에게 약 1 결(結)의 토지가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진부전은 이른바 자경무세전(自耕無稅田)이었다. 따라서, 진부는 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 이를 직접 경작해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봉집(三峰集)』

단행본

김태영, 『조선전기토지제도사연구』(지식산업사, 1983)
한우근 외,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을유문화사, 1987)
박종기, 『고려시대 부곡제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박종기, 『고려의 지방사회』(푸른역사, 2002)
박종기, 『고려의 부곡인, 〈경계인〉으로 살다』(푸른역사, 2012)

논문

유승원, 「조선초기의 신양역천계층」(『한국사론』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73)
정요근, 「고려시대 향·부곡의 성격 재검토: 하삼도의 향·부곡 주요 밀집 분포 지역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사학연구』 124, 한국사학회, 2016)
有井智德, 「李朝補充軍考」(『朝鮮學報』 21·22,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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