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 일명 관진(關津) · 진관(津關)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도(渡)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진(津)과 도는 강폭의 넓고 좁음에 따라 구별된 듯하지만 실상은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은 원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검색하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실제로는 명령의 전달과 강을 건너기 위한 교통 및 통신 기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이곳에는 관선(官船)인 진도선(津渡船: 나룻배)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사선(私船)과 수참선(水站船) 등도 이곳을 드나들었다. 진은 군현(郡縣)의 하부 조직이자 말단 행정구역이었으므로 진리(津吏)와 진척(津尺) 등이 거주하였으며, 구당(勾當)이 파견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전국의 강변에는 많은 진 또는 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압록강변의 압록도(鴨綠渡)와 예성강변의 벽란도(碧瀾渡), 임진강변의 임진도(臨津渡) · 장단도(長湍渡)와 한강변의 조강도(祖江渡) · 낙하도(洛河渡) · 양화도(楊花渡) · 사평도(沙平渡) · 용진도(龍津渡) 등이 유명하다. 특히, 벽란도는 대외무역항으로도 이용되었다.
이들 여러 나루에는 태조 이래 진도선의 운행을 담당하는 진척(津尺)이 있었으며, 994년(성종 13)에 압록강에 구당사(勾當使)를 둔 것을 시작으로 여러 나루에 구당사가 파견되었다. 구당사는 큰 강 또는 섬과 육지를 잇는 나루에 파견되어 도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 진에는 운영 경비의 조달을 위해 진전(津田)이 분급(分給)되었으며, 진척에게는 위전(位田)이 지급되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한강변에는 기존의 진 이외에 노량진(鷺梁津) · 흑석진(黑石津) · 공암진(孔巖津) · 도미진(度米津) · 광진(廣津) · 삼전도(三田渡) 등의 많은 나루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한강도(漢江渡: 이전의 沙平渡) · 노량진 · 낙하도 · 삼전도 · 양화도 등의 대도(大渡)에는 종9품의 도승(渡丞) 1인을 두어 각 진의 운영과 관리를 맡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아록전(衙祿田)으로서의 도전(渡田)이 8결(結)씩 분급되었으며, 진부(津夫)에게는 약 1결의 진부전(津夫田)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