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고 ()

목차
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후기,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기관.
이칭
이칭
덕천창(德泉倉)
제도/관청
설치 시기
고려 후기
폐지 시기
1403년(태종 3)
내용 요약

덕천고는 고려 후기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충렬왕대에 제국대장공주의 식읍에서 납부하는 곡식과 옷감을 관리한 것과 같은, 왕실의 사적인 재정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충선왕이 이를 물려받아 덕천창(德泉倉)이라고 부르다가 1325년(충숙왕 12)에 덕천고로 다시 고쳤다. 의성창(義成倉)과 함께 왕실의 사적 재정을 관리하는 기능을 하였으므로 사장(私藏)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의
고려 후기,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기관.
설치 목적

1275년(충렬왕 원년)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원성공주(元成公主)로 책봉하고 계림(鷄林,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경산(京山,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주8으로 주어 이를 주9의 운영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덕천창(德泉倉)은 1314년(충선왕 원년) 4월 3일조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것은 충선왕이 제국대장공주 사후에 주1을 물려받고 관리하는 기관을 두어 덕천창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재원(財源)은 충렬왕이 원성공주에게 내린 식읍에서 공납으로 바친 주2, 주3, 주4 등과 원성전의 주5에서 수납한 주6였다.

기능과 역할

『고려사(高麗史)』에서 덕천고(德泉庫)는 대체로 왕이 특별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행사를 개최할 때 재원을 조달했던 곳이었음이 확인된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주10과 덕천고, 보흥고(寶興庫)의 베 4만 8,000필을 내어 주11에 점포[鋪]를 열게 하였으며, 1349년(충정왕 원년)에는 의성창과 덕천고에 명령하여 왕의 어머니와, 공주 및 황후의 어머니에게 음식을 올리게 하였다. 덕천고가 왕실의 사적 재정 기관이었다는 것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사망으로 인희전(仁熙殿)에 천수도량(千手道場)을 설치했을 때, 그 비용을 덕천고에서 전담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356년(공민왕 5)과 1375년(우왕 원년)에는 덕천고로 들어오는 주12와 포를 광흥창(廣興倉)에 이관하여 주13의 녹봉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덕천창에는 사(使, 종5품), 부사(副使, 종6품), 승(丞, 종7품)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 1325년(충숙왕 12) 덕천고로 개칭하면서 모두 없앴다. 1330년(충숙왕 17) 다시 관원을 두고, 그 감독을 위해 사헌부(司憲府) 소속의 규정(糾正)에게 규찰하게 하였다. 1355년(공민왕 4) 다시 관원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고, 제거별감(提擧別監)에게 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가 1388년(창왕 1)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행(李行)의 건의에 따라 다시 사(使), 부(副), 승(丞), 주부(注簿) 등을 두었다. 이처럼 덕천고 관원의 치폐(置廢)가 잦았던 것은 이것이 왕실의 주7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변천사항

덕천고로 개칭된 후에도 1356년(공민왕 5) 무렵까지 여전히 덕천창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덕천고는 조선 초기까지 운영되다가 1403년(태종 3) 내섬시(內贍寺)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단행본

박종진, 『고려 시기 재정 운영과 조세 제도』(서울대출판부, 2000)

논문

김재명, 「고려 후기 왕실 재정의 이중적 구조」(『진단학보』 89, 진단학회, 2000)
이정란, 「고려·조선 전기 왕실부의 재정기구적 면모와 운영 방식의 변화」(『한국사학보』 40, 고려사학회, 2010)
주석
주1

고대 중국에서, 왕족, 공신, 대신들에게 공로에 대한 특별 보상으로 주는 영지(領地). 그 지역 조세를 받아 먹게 하였고, 봉작과 함께 대대로 상속되었다. 우리말샘

주2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우리말샘

주3

우리나라에서 나는 견직물을 명주(明紬)에 상대하여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4

삼실로 짠 천. 우리말샘

주5

관아, 학교, 사원 따위의 유지를 위하여 마련한 토지. 신라 때의 승위전(僧位田), 고려 시대의 섬학전, 조선 시대의 공수전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6

조세로 거두는 쌀과 콩을 아울러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7

돈과 곡식. 우리말샘

주8

중국에서, 목욕하는 데 쓸 비용을 마련하도록 나라에서 특별히 내려 준 채지. 주(周)나라 때에, 천자가 제후에게 이 같은 목적으로 채지를 내려 준 것에서 유래한다. 이후에는 임금을 비롯한 일가들이 부세를 거두어 관할하는 지역을 뜻하게 되었다. 우리말샘

주9

고려 후기에, 개경의 궁궐에 있던 전각. 전각의 이름은 충렬왕의 비인 제국 대장 공주가 충렬왕 원년(1275)에 원성 공주로 책봉되면서 함께 내려진 전호(殿號)이다. 우리말샘

주10

고려 시대에, 왕실 재정을 맡아보던 관아. 충숙왕 17년(1330)에 내방고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1

‘시장’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2

명주실로 무늬 없이 짠 천. 우리말샘

주13

모든 벼슬아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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