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를 낳은 왕비의 권초(捲草 : 출산 때 까는 거적 짚)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1392년(태조 1) 설치한 덕천고(德泉庫)를 1403년(태종 3) 6월의 관제 개혁 때 내섬시로 고친 뒤, 1405년 3월에 육조의 분직과 소속을 정하면서 호조의 속사(屬司)가 되었다.
1637년(인조 15)에 양난을 겪고 난 뒤의 재정 궁핍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용관(冗官)을 줄이면서 일시적으로 내자시(內資寺)를 병합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분리하였다.
1800년(정조 24) 4월에 다시 국가의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혁파, 호조 소속의 공상육사(供上六司) 가운데 공상물종이 내섬시와 비슷한 의영고(義盈庫)에 병합하였다.
각 궁 및 전에 대한 공상과 직조 등의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물품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공장(工匠)이 소속되어 있었다. 즉, 옹장(瓮匠) 8인, 방직장(紡織匠) 30인, 성장(筬匠) 2인으로 모두가 도자기 생산과 직조에 관련된 장인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관장(官匠)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에 들어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모두 없어졌다. 한편, 내섬시의 소관 업무 가운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왜인 및 야인에 대한 공궤는 양난을 겪고 난 뒤 국제 관계의 변화로 담당하지 않게 되었다. 또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 및 직조도 폐지되었다. 그 대신 기름[油]과 식초[醋] 및 소선(素饍)의 공상을 담당하였다.
관원으로 제조(提調)·정(正, 정3품)·부정(副正, 종3품)·첨정(僉正, 종4품)·판관(判官, 종5품)·주부(主簿, 종6품)·직장(直長, 종7품)·봉사(奉事, 종8품) 각 1인을 두었다.
조선 전기에는 정3품 아문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주부 이하의 관원을 제외하고 모두 폐지해 종6품 아문으로 강등되었다. 이속(吏屬)으로는 서원(書員) 6인과 군사 1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