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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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양(良) · 천(賤) 사이의 신분 변별책으로 설치되어 오위(五衛) 중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된 병종(兵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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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양(良) · 천(賤) 사이의 신분 변별책으로 설치되어 오위(五衛) 중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된 병종(兵種).
내용

천인종량자(賤人從良者)가 일정한 기간 복무하면 양인이 될 수 있었던 제도이다.

1415년(태종 15) 설치 당시에는 보충군(補充軍)이라 불리었으나 1469년(예종 1) 보충대로 개칭되었다. 보충군은 비첩산(婢妾産) 및 속량(贖良) 보충군, 가평민(嫁平民) 보충군, 신량수군(身良水軍) 및 물문시비(勿問是非) 보충군, 칭간칭척(稱干稱尺) 보충군으로 나뉘었다.

비첩산 및 속량 보충군은 대소인원의 천첩소생으로 사재감(司宰監)의 수군에 입속되었다가, 보충군의 설치와 함께 이속되었다. 다른 보충군은 세조대 이후 소멸된 것과는 달리 이들은 계속 남아 보충대의 근간을 이루었다.

가평민 보충군은 공·사비(公私婢)와 평민 사이에 난 자들로 1432년(세종 14) 3월 종량법(從良法)이 실시되기 이전에 종량되었던 자와, 종천법(從賤法)의 예외로 인정된 40세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는 평민의 천첩소생 승중장자(承重長子)가 입속하였다.

신량수군 및 물문시비 보충군은 고려 말 이래 문란해진 신분제 아래에서 양천의 혼란을 바로잡하려는 의도에서 설치되었다. 신량역천(身良役賤) 보충군은 소량자(訴良者) 가운데서 양·천적(良賤籍)이 명백하지 않은 자들을 1415년 사재감의 수군에 입속시켰다가 보충군 설치 이후 이속시킴으로써 성립되었다.

물문시비 보충군은 1417년 노비쟁송을 영원히 중단시키기 위해 소송이 진행중인 노비를 시비를 가리지 않고 보충군에 입속시킴으로써 성립되었다. 칭간칭척 보충군은 신량역천계층을 정리하기 위해 1415년 보충군에 입속시켰다.

이렇게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구성된 보충군은 1432년 양천교가(良賤交嫁)가 금지되어 종천법이 실시된 뒤 그 예외로서 종량된 1품 이하 동·서반, 문·무과 출신인, 생원·성중관(成衆官)·유음자손(有蔭子孫)의 사비작첩(私婢作妾)의 소생과 40세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는 양인의 천첩 승중장자만이 입속되도록 수정되었다.

그 뒤 이 보충군은 1468년(세조 14) 종부법(從父法)의 실시로 일시 폐지되었으나 곧바로 종천법이 부활되면서 1469년 보충대로 개칭, 다시 설치되었다.

이들의 입역기간(立役期間)은 1,000일이 원칙이었으나 3품 이상의 자손은 330일,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천첩 승중장자는 그 절반만 근무해도 조부(祖父)의 품계에 따라 한품수직(限品授職)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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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조선사회사연구』(송준호, 일조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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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노비면천」(정현재, 『경북사학』 5, 1982)
「16세기 천첩자손의 신분결정」(지승종, 『현대 자본주의와 공동체이론』, 1987)
「선초 보충군산고」(임영정, 『현대사학의 제문제』, 1977)
「보충군 입역규례를 통해 본 조선초기의 신분구조」(전형택, 『역사교육』 30·31, 1982)
「李朝補充軍考」(有井智德, 『朝鮮學報』 21·22, 1962)
집필자
전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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