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所)는 고려시대 특수행정 구역이다.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를 구성하며, 주로 왕실·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광업·수산업 부문의 공물을 생산하였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그 성격에 대해서는 물품 생산에 종사하는 천민이 거주하는 특수행정 구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특정 물품의 생산에 유리한 촌락을 지정하여 각종의 역을 부담하는 염호(鹽戶)·묵호(墨戶) 등을 구성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 은소(銀所) · 동소(銅所) · 철소(鐵所) · 사소(絲所) · 주소(紬所) · 지소(紙所) · 와소(瓦所) · 탄소(炭所) · 염소(鹽所) · 묵소(墨所) · 곽소(藿所) · 자기소(瓷器所) · 어량소(魚梁所) · 강소(薑所) · 다소(茶所) · 밀소(蜜所) 등의 예를 찾을 수 있다. 발생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향 ·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들어와 공물의 확보를 위해 정책적으로 설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격에 대해서는 부곡제의 이해방식과 관련해 대략 두 가지의 상이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먼저 종래의 통설로서 받아들여지던 부곡제 천민설(賤民說)에 의하면, 소의 주민은 전문적인 물품생산에 종사하는 공장(工匠)으로 신분적으로는 천민이며, 따라서 소는 천민의 집단거주지로서 양민(良民)으로 구성된 군현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수행정구역이었다고 한다. 이 경우 소의 기원은 신라 말기에 있어서 군소 호족(豪族)들이 지배하던 지역이나, 고려시대에 전쟁 포로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던 지역, 그리고 반역을 일으킨 지역을 강제적으로 편성한 데서 찾아진다. 또한, 수취체계에 있어서도 일반 군현과 구별되어 소사(所司), 즉 소의 공부(貢賦)를 수취하는 특정관사를 통해 중앙정부에 직속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최근에 대두한 부곡제 양민설의 경우, 소는 일반 군현과 구별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군현 예하의 일반 촌락 가운데 자연적 · 사회적 입지조건에 따라 특정 물품의 생산에 유리한 촌락을 국가에서 지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때 소의 주민은 전문기술자인 장인과 장인의 물품생산을 돕기 위한 각종의 역(役)을 부담하는 금호(金戶) · 은호(銀戶) · 염호(鹽戶) · 묵호(墨戶) 등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일반 촌락민으로서 신분적으로는 양인(良人)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반역 등의 행위로 촌락 전체가 강등되어 주민들이 특정한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것은 오히려 특별한 경우이고, 군현에 부과된 특정물품의 생산을 위해 일반 촌락민들을 요역의 형태로 동원하는 경우가 보다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소의 주민에게 부과되는 역 자체가 과중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일반 백성들이 이를 꺼리고 천시했으므로 일반 군현과 소의 차별은 그대로 인정된다. 이 때문에 소민(所民)이 공을 세웠을 때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켜주는 조처가 포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는 소민의 저항이나 입공(立功) 등에 의해 개별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면서 점차 감소하였다. 1176년(명종 6)에 공주의 명학소(鳴鶴所)가 망이(亡伊) · 망소이(亡所伊) 등 소민들의 저항에 의해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소민의 입공에 의해 1255년(고종 42)에 충주의 다인철소(多仁鐵所)가 익안현(翼安縣)으로, 1321년(충숙왕 8)에 함열현(咸悅縣)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가 용안현(龍安縣)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반면 일반 군현이 강등되어 소로 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소의 해체 현상은 조선시대에 더욱 두드러져, 조선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소는 향 · 부곡과 함께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또는 직촌(直村)으로 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능은 철간(鐵干) · 염간(鹽干) · 생선간(生鮮干) · 수참간(水站干) · 은척(銀尺) · 진척(津尺) 등 소위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을 이루는 간척(干尺)의 무리에게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