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일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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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로서, 정월 7일인 인일(人日)을 기념하여 성균관에서 시행하던 시험.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736년(영조 12)
폐지 시기
1894년(고종 31) 2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인일제(人日製)는 조선시대,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로서, 정월 7일인 인일(人日)을 기념하여 성균관에서 시행하던 시험이다. 주요 시험 대상은 성균관 유생이었다. 영조 대에 이르러 인일제의 시행이 본격화되었으며, 이후 고종 대까지 지속되었다. 인일제의 주요 시험 대상은 성균관의 원점유생(圓點儒生)이었으나, 때로 지방 유생을 뽑기도 하였다. 수석 합격자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혜택이 부여되었으며, 시험은 대부분 성균관에서 거행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로서, 정월 7일인 인일(人日)을 기념하여 성균관에서 시행하던 시험.
내용

조선시대, 정월 7일에 임금에게 하례(賀禮)를 드리는 인일하례(人日賀禮)와 인일제(人日製)가 거행되었다. 인일제는 삼일제(三日製) · 칠석제(七夕製) · 구일제(九日製) · 황감제(黃柑製)와 함께 오순절제(五巡節製)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도 인일하례 의식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문무 양반에게는 인승(人勝)과 녹패(祿牌)를 하사하였다. 하지만 인일제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 시행 여부를 단언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일제는 조선시대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사항

1601년(선조 34)에 인일제를 다시 시행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인일제는 영조 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1729년(영조 5)에 대사성 조현명이 오순절제 가운데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은 인일제와 칠석제를 다시 시행하자고 건의하였다. 시험 대상은 원점(圓點)이 찼거나 석전(釋奠)에 여러 번 참여한 성균관 유생이었다. 마침내 1736년(영조 12)에 인일제가 시행되어, 1894년(고종 31) 2월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인일제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성균관 유생인 반유(泮儒)였으나, 지방 유생 중에서 뽑기도 하였다. 인일제의 수석 합격자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갈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혜택을 받았다. 시험 장소는 대부분 성균관이었지만, 명정전이나 춘당대 등에서 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1800년(정조 24)에 춘당대에서 시행된 인일제에는 참가자가 10만 명이 넘었으며, 시험지를 제출한 사람도 3만 명을 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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