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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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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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의례·행사
전통 사회에서 산천 · 묘사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지내던 유교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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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통 사회에서 산천 · 묘사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지내던 유교의례.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祭享)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釋)은 ‘놓다(舍也)’·‘두다(置也)’의 뜻이고, 전(奠)은 ‘그치다(停也)’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薦饌)’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迎尸)’ 등의 제사 절차는 갖추어 베풀지 않았다.

일설에는 소[牛]·양(羊)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菜: 빈조류(蘋藻類)]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釋菜)라 한다. 석채는 또 석채(釋采)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采帛)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전은 석채·석전(舍奠)·정제(丁祭)·상정제(上丁祭) 등의 일컬음이 있다. 정제니 상정제니 하는 것은 석전을 봄 2월(음력),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上丁日: 첫 丁日)에 모시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상대(上代)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周禮)』, 「춘관(春宮)」],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禮記)』, 「왕제(王制)」]. 전자를 정기적(常時)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非時)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가르치는 교관(敎官)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란 앞서 간 전대(前代)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周代)에는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을 선성(先聖)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漢)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같은 제왕은 주공(周公)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魏)·수(隋)·당(唐)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明)나라에 와서 태학(太學)의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太學: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十哲: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國子監) 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先聖廟) 또는 문선왕묘(文宣王廟)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獻酌)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10철과 송조6현(宋朝六賢)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모두 330여의 향교가 있어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남한에 있는 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결정으로 과거 동무·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 우리나라 명현 18위는 대성전에 종향하고 중국 유현 94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

내용

집례 및 묘사(廟司)가 먼저 섬돌 아래에서 4배(拜)를 올린 뒤 손을 씻고 자기 위치에 선다.

① 창홀(唱笏):집례가 홀기를 부르기 시작한다. 전악(典樂)이 악사(樂士)와 무생(舞生)을 인솔하여 정해진 위치로 입장하면, 찬인이 대축(大祝)과 모든 집사(執事)를 인도하여 섬돌 아래서 4배하도록 한다. 대축과 모든 집사가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각각 자기 위치로 가서 선다.

묘사 및 봉향(奉香)·봉로(奉爐)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開櫝)한다. 알자와 찬인이 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정해진 위치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행사의 시작을 청하고 당하악(堂下樂)이 연주되고 문무(文舞)가 시작되면 헌관과 참례자 일동이 4배한다.

② 전폐례(奠幣禮):폐백을 드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안자 신위, 증자 신위, 자사자 신위, 맹자 신위 순으로 세 번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당상악(堂上樂)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③ 초헌례(初獻禮):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으로 가면 당상악과 문무가 시작된다. 공자 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서서 꿇어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초헌관은 안자·증자·자사자·맹자 신위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④ 아헌례(亞獻禮):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 아헌관이 공자·안자·증자·자사자·맹자 순으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武舞)가 연주된다.

⑤ 종헌례(終獻禮):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예로, 종헌관이 앞의 순서대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를 춘다.

⑥ 분헌례(分獻禮):앞서 술잔을 올린 공자와 네 신위 이외에 종향(從享)되어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드리는 예이다. 동종향분헌관(東從享分獻官)과 서종향분헌관(西從享分獻官)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동종향 17위, 서종향 17위에 술잔을 올린다.

⑦ 음복례(飮福禮):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먹는 예이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음복하는 곳으로 나아가 술과 포를 음복한다. 대축이 철상(徹床)을 한다. 당상악을 그치고 당하악을 연주한다.

⑧ 망료례(望燎禮):제사가 끝나서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보는 예이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축문 사르는 곳으로 나아가면 대축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른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을 아뢰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감으로써 행사가 모두 끝난다.

참고문헌

『주례(周禮)』
『예기(禮記)』
『태학지(太學志)』
『대한예전(大韓禮典)』
『성균관약사(成均館略史)』(성균관, 1982)
『석전(釋奠)』(성균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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