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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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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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법당(法幢) 소속의 군병(軍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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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 법당(法幢) 소속의 군병(軍兵).
개설

신라 통일기(統一期)의 법당은 치안유지적 성격과 노역부대적 성격을 모두 지닌 부대였다. 법공부는 법당에 편성된 농민들이 노역에 동원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법공부는 주로 축성(築城)·축제(築堤)작업이나 제방수리 등을 수행하였다.

내용

798년에 세워진 「영천청제비정원치수기(永川菁堤碑貞元修治記)」에 따르면 “모두 합해 부척(斧尺) 136인, 법공부(法功夫) 1만 4,140인을 동원해 영천 청제(菁堤)를 수치(修治)했다”고 한다. 이 영천 청제의 역(役)은 한정된 지역에서 수행되는 지방역역(力役)이었다. 그 공사의 책임자로 병진명(丙辰銘)에서는 사인(使人)이 파견되고, 정원명(貞元銘)에서는 소내사(所內使)가 임명되고 있다. 이를 통해 청제가 소재한 지역은 왕실직할지(王室直轄地)로 추정되고 있다. 정원명에 따르면, 왕실직할지 내의 노동인력 외에 인접한 절화군(切火郡)과 압량군(押梁郡)에서 조역(助役) 동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천 청제비 정원명에 나오는 “부척(斧尺) 136인, 법공부 1만 4,140인”은 왕실직할지 내의 노동인원과 아울러 절화군과 압량군에서 동원된 조역을 포함한 인원수이다.

신라에서는 524년(법흥왕 11)경에 촌락의 농민들로 구성된 법당(法幢)이라는 군부대를 전국적으로 편성하였다. 법당의 군병은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전쟁에 동원되지만, 평상시에는 농사에 종사하면서 매년 농한기에 일정기간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한, 국가에서 요구하는 노역(勞役)에 동원되기도 해, 이른바 전투부대이면서 동시에 노동부대였다. 법당은 삼국통일(三國統一) 전에는 주로 전투에 동원되었으나, 통일 후에는 주로 노역에 동원되었다.

법당의 군병이 노역에 동원되었을 때 이들을 법공부라 불렀다. 영천 청제비에 보이는 법공부 1만 4,140명은 그 인원으로 보아, 당시 상주(尙州)와 양주(良州)의 모든 군현(郡縣)에서 동원된 숫자였다.

그러나 1만 4,000여 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동원된 것이 아니라 2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교대로 동원되었다. 일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서원경(西原京) 부근의 촌락장적(村落帳籍: 新羅村落文書)에도 ‘여자(余子)’,‘법사(法私)’ 등의 용어가 기재되어 있어 이들 촌락에도 법당이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계연(計烟) 1에 해당하는 정(丁) 수는 7인으로 그 가운데 1인은 중앙의 군역에 동원되었고, 나머지 6인은 법당의 군역에 동원되었다. 따라서 계연 1인에 해당하는 정남(丁男) 6명이 2개월 동안 교대로 영천 청제비를 쌓는 데 법공부로 동원되었다면, 각기 10일씩 노역에 동원되고 1회 동원된 법공부의 총인원은 2,357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법공부로 동원되는 자체가 당시 농민들의 세역(歲役)은 아니었다. 축성이나 축제에 법공부로 동원되는 경우에는 같은 노역이라고 하더라도 군역(軍役)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세역의 의무는 따로 부과되었다.

법공부로서 부담하는 군역이 장거리 이동을 요하고 힘든 노역이라면, 세역은 가까운 지역에 동원되며 힘이 적게 드는 노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역 기간은 1년에 20일 정도였다. 영천 청제비 정원명에 따르면 청제가 소재한 왕실직할지와 인접지역인 절화·압량 2군의 노동인원이 동일하게 부척과 법공부로 파악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역 부담이라는 측면에서도 왕실직할지 주민과 일반 군현민(郡縣民) 사이에 특별한 구분이 없었다. 다만 왕실직할지 주민이 부담하는 세역(稅役)은 모두 왕실에 귀속되었다.

도적이 출몰하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에 법당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당시 농민들은 매년 농한기마다 원칙적으로 10일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처럼 농민들이 반란을 진압하거나 도적을 잡기 위해 법당의 군병으로 동원되거나, 혹은 법공부로서 노역에 동원된 해에는 군사훈련이 면제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통일기(新羅 統一期)의 왕실 직할지(王室 直轄地)와 군현제(郡縣制)-청제비 정원명 역역운영(菁堤碑 貞元銘 力役運營) 사례 분석-」(하일식, 『동방학지(東方學志)』97, 1997)
『신라촌락사회사연구(新羅村落社會史硏究)』(이인철, 일지사(一志社), 1996)
『신라정치제도사연구(新羅政治制度史硏究)』(이인철, 일지사(一志社), 1993)
『역주 한국고대금석문(譯註 韓國古代金石文) 3』(한국고대사회연구소(韓國古代社會硏究所) 편, 1992)
「영천 청제비 정원수치기(永川 菁堤碑 貞元修治記)의 고찰」(이기백, 『고고미술(考古美術)』102, 1969;『신라정치사회사연구(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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