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관아에서 부과한 요역’이라는 견해와 ‘잡다한 역’이라는 견해가 있다. 고려시대에 잡역은 ‘잡역을 하는 비녀(婢女)’라는 표현에서 ‘잡다한 역’의 용례가 있다. 『 고려사』에는 "주진(州鎭) 입거 군인에게 본관의 잡역을 면제하라"는 용례에서 지방적 요역의 의미도 있다. 여기에서는 지방적 요역에 한정하기로 하겠다.
잡역의 내용은 축성 · 제언 등 토목공사, 관리 접대의 영송(迎送) · 지대(支待), 공해전(公廨田) 등의 토지 경작 등 잡다하였다. 안렴사의 임기가 6개월로 짧은 제도적 특징 때문에 영송 · 지대의 잡역 동원이 많았다. 잡역의 운영은 수령의 자의에 맡겨졌고, 일반 농민 외 군인 · 노비까지 부과 대상이었다. 고려 전기에 잡역 동원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한 9등호제(九等戶制)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2세기 이후 수리사업 주체가 지방관으로 바뀌면서 잡역에서 소규모의 제언 축조 역사가 증대하였다. 국가적 조운제가 군현주도로 전환되면서, 일반민이 세곡을 생산지에서 조창까지 운반하는 수역(輸役)에 동원되는 일이 많아졌다. 고려 후기 중앙적 요역은 물납 · 고립제가 전개되었지만, 잡역은 직접 동원이 원칙이었다. 공물 대납제가 확산되면서 상요(常搖) · 잡공(雜貢)이 부가되었는데, 잡역의 증가도 확대되었을 수 있다. 잡역은 토지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한 3등호제(三等戶制)에 입각하여 동원하였다.
조선시대에 요역은 중앙적인 소경요역(所耕徭役)과 지방적인 잡역이 존재하였다는 견해, 소경요역과 지방적인 호역(戶役)이 존재하였다는 견해 등이 있다. 또한 소경요역 · 잡역 · 호역은 요역의 특징을 표현하는 동일한 개념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에서의 잡역은 토목공사, 진상(進上), 국왕 · 사신 · 관리 등을 접대하는 영송 · 지대, 목재 · 석재 운반, 얼음 저장의 장빙(藏氷), 장례를 돕는 조장(助葬) 등 지방 관부 유지에 필요한 모든 역이 해당된다. 수령의 자의에 맡겨져 사역 기한 없이 수시로 징발되었으며, 군인 · 노비 등 신역 담당자나 1458년(세조 4) 이전까지는 맹인(盲人)의 외동딸까지 편호 대상이었다. 출정 기준은 전결과 인정을 절충하여 적용하였다.
17세기 대동법은 요역제 전반에 중대한 변동을 가져왔다. 잡역에서는 군현의 관수(官需) 물자, 장빙, 신구관 영송 쇄마(刷馬), 경기 지역의 장례 · 무덤을 조성하는 예장조묘(禮葬造墓) 등 상당 부분의 잡역이 대동미(大同米)로 물납세(物納稅)화되었다. 일부 노동력 징발 방식이 유지되었던 잡역에서도 장기간의 사역 일수 등에 제한이 가해지고, 종전과 같은 무상 노동이 아니라 역량(役糧)을 지급하는 변화가 일어나 지방 관부에서는 다른 재정 수입원이 필요하였다.
그 대안책으로 호렴(戶斂) 또는 결렴(結斂)에 의해 잡역세가 징수되어 꿩 · 땔나무 · 얼음 등 대동미에서 제외된 관수 물자를 사서 쓰는 데 사용하였다. 또 관아의 각종 공역(公役) 경비, 사신 · 암행어사 · 관찰사 등의 영접 · 지대 역에 고립이 사용되었다.
잡역세를 효율적으로 징수하기 위하여 민고(民庫)를 설치하였다. 민고는 관청 내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확보된 전곡(錢穀)의 이자 수입으로 관용 경비를 보충하였다. 민고를 기반으로 운영된 잡역세는 잡역의 물납화 · 고립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3정(三政)과 아울러 4정이라는 농민 수탈을 가중시키는 부세가 된 점은 한계이다.
요역 노동 가운데 지방적 잡역은 중앙적 요역보다 장기간에 걸쳐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였다. 조선 후기에 잡역의 물납화(物納化)는 전결화(田結化)로 인한 양반 지주에 대한 인신적 예속 관계에서의 이탈과, 봉건적 수취제도의 타파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