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役)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징발하는 세목으로 이해된다. 역이 중앙정부 차원의 노동력 징발이었다면, 상요는 지방 수령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한 세목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당(唐)나라의 잡요(雜徭)에 비견된다.
이렇게 본질이 노동력의 징발이었던 만큼 역과 마찬가지로 상요도 15세에서 59세까지의 성인 남자인 인정(人丁)의 다과를 수취기준으로 하였다. 즉 인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 호(戶)가 부담하는 상요의 액수에 차이가 있었다.
한편 상요를 통해 징발되는 노동력의 주된 활용처는 잡공(雜貢)의 생산이었다. 자연물의 채취 및 가공을 거쳐야만 하는 잡공 물품의 생산에는 상당한 노동력이 소요되었는데, 바로 이 때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세목이 상요였다.
결국 농민은 상요란 세를 부담하고, 국가는 이를 바탕으로 생산된 다양한 잡물을 잡공이란 세목으로 수취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잡공 생산을 위한 자연물 채취에 활용된 만큼 상요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실농(失農)의 폐해가 자주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는 실농의 폐해를 고려하여 주로 농한기에 징발함을 원칙으로 했던 중앙정부 차원의 역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 외에도 상요는 관아(官衙) 건립을 비롯한 각종의 토목공사, 관둔전(官屯田)의 개간과 경작, 군현에서 내는 각종 부세의 수송, 사신의 영송 등에 소요되는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토목공사 및 사신의 영송 등은 항례적인 일이 아니며, 관둔전 또한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
따라서 상요는 항례적이고, 노동력 동원의 규모가 비교적 컸을 잡공 생산에 주로 투입되었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당나라의 예로 미루어 보아 상요의 일한은 일반적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역보다 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다수의 이견도 제기되었다. ① 고려 전기의 용(庸 : 役)을 대신한 고려 후기의 토산 현물세, ② 공역(貢役)을 매개로 하여 채집·생산·상납되는 물건 또는 이에 소요되는 노역, ③ 공역의 물납(物納), ④ 고려 후기에 새로 생긴 현물세 등등의 견해도 있다.
이들 학설은 상요란 세목으로 수취되는 것이 현물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상요가 전기부터 있었던 세목인가 아니면 후기에 비로소 등장한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상요가 물품을 거두는 세목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고려사』의 몇몇 기록이라든가, 선초의 예이기는 하지만 수령이 민호에게 부담시키는 「삼시지역(三時之役)」이 곧 상요였음을 알려 주는 『세종실록』의 기사를 고려할 때, 상요를 물품세로 보기는 어렵다.
삼시지역은 삼시에 걸쳐 수시로 이루어지는 노동력의 징발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요와 잡공의 합칭으로 판단되는 요공(徭貢)의 용례가 고려 전기의 사료에 보이고 있다. 따라서 상요를 후기에 생긴 세목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더 검토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