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고려·조선시대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기 위해 설치된 왕도의 외곽 지역이다. 천자가 도읍한 ‘경사(京師)’와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를 일컫는 ‘기’에서 유래하였다. 통일신라 때에도 왕도의 외곽지역을 특별구역으로 설정하였으나 경기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1018년에 고려의 왕도 개성부의 외곽을 공식적으로 경기라고 지칭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왕도 보위지역으로 삼았다. 궁궐과 성곽을 축조하는 요역에 우선적으로 징발되고 조세의 부과도 과중에게 책정되는 등 타도민에 비해 과중한 부담이 지워졌다.
원래 ‘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뜻하고, ‘기’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으나 점차 ‘왕도의 외곽지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경기’라는 말은 당나라시대에 왕도의 주변지역을 경현(京縣, 赤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데서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특별구역으로 설정해 왕도의 보위를 도모했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의 일이다. 그 영역은 대체로 고려 초의 경주대도독부 관내와 일치하였다. 이곳에는 육정(六停)의 군사집단과 각종의 성(城) · 별궁(別宮) · 문역(門驛) 등이 설치되었으며, 일부 향(鄕) · 성(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왕도의 외곽지역을 ‘경기’라 부르지 않았으며, 외곽지역 자체가 왕도의 일부였다는 이설도 있다.
왕도 개성부의 외곽 지역을 공식적으로 경기라고 칭한 것은 1018년(현종 9)의 일이다. 현종은 995년(성종 14년)에 설치된 왕경 개성부를 없애고, 대신 개성현을 두어 정주, 덕수, 강음 3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장단현의 현령이 송림 · 임진 · 토산 · 임강 · 적성 · 파평 · 마전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여 ‘경기(京畿)’라고 하였다. 성종 때의 적현 · 기현, 특히 역대 여러 왕 · 왕후의 능이 소재한 적현은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려는 의도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반면 현종 때의 경기는 왕실 경비의 일부를 지용(支用)하는 궁원전(宮院田)과 중앙관청의 공해전(公廨田) 등을 개성 주위에 집중시키고, 공신전(功臣田) · 양반전(兩班田) 등의 사전(私田)을 외방 주현(州縣)에 둠으로써 왕실과 관청의 경비를 용이하게 조달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권귀(權貴)는 외방에 지급된 사전에서 전조(田租)를 과다하게 수취하였고, 농민을 인격적으로 지배하는 등 폐단이 야기되었다. 이에 사전의 경기 내 지급과 이를 위한 경기의 확대가 요청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기는 1069년(문종 23)에 양광(楊廣) · 교주(交州) · 서해도(西海道)로부터 39현을 이입해 원경기(原京畿) 13현과 합해 총 52현을 관할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전의 경기 내 지급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의 영역도 현종대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그 뒤 무신집권기와 대몽항쟁기를 거치면서 권귀의 사전 확대는 경기와 외방을 막론하고 일반화되었다.
사전을 경기 내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원종대에 녹과전제(祿科田制)의 실시로 나타났다. 부족한 관원의 녹봉을 보충해주기 위해 지급된 녹과전은 경기 8현의 토지로 국한되었다. 또, 이러한 전통은 고려 말에 단행된 사전개혁에도 계승되어 과전법(科田法)에 반영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기는 문종 때 확대되었던 영역과 비슷한 규모로 재편되어 총 44현을 통할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도(道) 단위의 지방조직으로 변모했고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되었다.
당시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영역은 개성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 · 당성(唐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 · 금주(衿州 :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 과주(果州 : 지금의 경기도 과천), 서로는 안주(安州 : 지금의 황해도 재령) · 연안(延安), 동으로는 철원과 포주(抱州 : 지금의 경기도 포천), 북으로는 곡주(谷州 : 지금의 황해도 곡산) · 수안에 이르는 범위로, 통할하는 현(縣)의 수는 문종 때보다 적으나 실제 영역은 그보다 확대된 규모였다.
이러한 경기의 재확대는 1391년의 과전법 실시를 위한 선결조처의 하나로서, 과전을 비롯한 각종의 사전 지급을 경기 토지로 한정시키기 위해서 였다. 이와 같은 사전 지급지로서의 경기의 의미는 과전법이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고, 다시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상실되었으나, 이에 대신해 왕실의 궁방전(宮房田)과 양반관료의 거대한 사유지가 설치되었다.
한편, 왕도 보위지역으로서의 경기의 의의는 고려 이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초에 단행된 경기의 재편과 인조 이후 설치된 사유수부제(四留守府制)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 말의 경기 좌 · 우도는 태조 · 태종 · 세종대를 거치면서 다시 ‘경기’로 합칭되었고, 수안 · 곡주 · 연안 등 이전 경기의 서북지역이 풍해도(豐海道 : 지금의 황해도)로 환속되고, 광주(廣州) · 수원 · 여주 · 안성을 비롯한 동남지역이 경기로 이속되는 등, 한양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 이루어져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은 신 왕도인 한양을 보위하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 병자호란과 이괄(李适)의 난 등을 겪은 인조대 이후, 경기의 네 요충지인 개성 · 광주 · 수원 · 강화에는 유수부와 함께 관리영(管理營) · 수어청(守禦廳) · 총리영(摠理營) · 진무영(鎭撫營) 등의 군영이 설치되어 왕도와 왕실의 보위를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경기는 고려시대와 같이 역대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위치하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곳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 · 조선의 양시대에 걸쳐 왕도와 왕실의 보위기능을 지닌 경기였지만, 타지역보다 우대받지는 못하였다. 고려의 경우,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경기 관내에도 수령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경기의 주현(主縣)에 파견된 수령의 관품도 타도 수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요역(徭役) · 과렴(科斂) · 조세의 부과라는 면에서 경기민(京畿民)에게는 타도민에 비해 과중한 부담이 지워졌다. 궁궐과 성곽의 축조 등 각종의 역사에 경기민은 우선적으로 징발되었으며, 상공(上貢)에 필요한 물품 및 재원을 마련할 때에도 경기민에 대한 과렴은 1차적으로, 그리고 과중하게 책정되었다.
또 경기에는 각종의 사전이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경작하는 경기민은 사전주(私田主)에 의해 과다한 조세를 수취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중한 부담은 곧 경기의 피폐를 가져왔으므로, 중앙정부는 때때로 경기민에 대해 면세 · 면역 및 각종 진휼의 혜택을 베풀기도 하였다. → 경기도(京畿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