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개성부(開城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왕경(王京) 지역에 설치된 특별 행정구역으로서 장관은 윤(尹)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부사(知府事)가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이다. 이 둘은 공존하지 않았고, 하나의 연혁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성격이나 운영에서 차이가 있었다.
고려의 왕도(王都)는, 919년(태조 2)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이를 개주(開州)라 부르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주에는 궁전과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해 5부(部)로 나누었다.
987년(성종 6)에 5부 방리를 다시 정했으며, 995년 개성부로 바꾸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두어 적현(赤縣) 6현과 기현(畿縣) 7현을 관장하였다. 이 개성부는 별도의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현과 기현으로 구성된 상급 단위였으며 당나라의 경조부(京兆府)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018년(현종 9) 개성부를 없애면서 경중(京中)의 5부를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시키고 따로 경기(京畿)를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개성현령(開城縣令)과 장단현령(長湍縣令)이 각각 3현과 7현을 관할하면서 상서도성(尙書都省)에서 직접 관할을 받았다.
1062년(문종 16)에 개성현령을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승격시키고,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 관내에 있던 우봉군(牛峯郡)을 이속시켰다. 장단현령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주현군(州縣軍) 편성에서 개성부도(開城府道)를 두었는데, 그 정원은 보승(保勝)이 52인, 정용(精勇)이 240인, 일품군(一品軍)이 190인이었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한 뒤, 급전도감(給田都監) 및 5부를 개성부에 합쳐 도성 내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면서, 개성부의 행정상 지위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개성부는 지방 행정구역이었으나, 이제 도성 내의 5부까지 모두 관할하게 되면서 중앙 기관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에 직제도 확대되어 판부윤(判府尹: 정2품) 1인, 부윤(府尹: 정3품) 2인(1인은 겸임관), 소윤(小尹: 정4품) 3인(1인은 겸임관), 판관(判官: 정5품) 2인, 기실참군(記室參軍: 정7품) 2인을 두었다. 이 가운데 부윤 이하의 관리는 서울 성안을 맡되, 모두 선공시(繕工寺)의 사무를 겸임하였다. 이와 별도로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의 주변 지역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품계를 개정해 윤(尹)을 종2품, 소윤을 정4품, 판관을 정5품, 참군을 정7품, 현령을 정7품, 현승을 정8품으로 개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판부사(判府事)를 더 두었는데, 그 지위는 윤의 위이고, 품계는 윤과 같았다.
그 뒤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눌 때 개성현은 우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 왕경에 설치된 개성부는 특별 행정구역인 적도 있고,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이기도 했던 특수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이를 통해 왕경과 경기의 제도적 추이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