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은 고려시대 경군의 6위(六衛)와 지방의 주현군(州縣軍)에 있었던 병종(兵種)이다. 양계의 주진군에 있던 정용은 초군(抄軍) 또는 초정용(抄精勇)으로 불렀다. 외침에 대한 방어, 내란 진압 등의 전투와 변경 지역의 방수(防戍),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일반 농민으로 구성된 주현군의 정용이 번상을 하면 6위의 정용이 되고, 반대로 6위의 정용이 하번을 하면 주현군의 정용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또한 같은 명칭의 부대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중앙정부에서 직접적으로 군사적 지휘를 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6위에 소속된 경군의 정용은 좌우위(左右衛) 3영(領) 3천명, 신호위(神虎衛) 2영 2천명, 흥위위(興威衛) 5영 5천명, 금오위(金吾衛) 6영 6천명 등 모두 16영의 1만 6천명이었다. 또한 주현군에는 5도에 약 1만 9천명, 양계에 약 1만 8천명의 정용이 있었다.
이들은 외침에 대한 방어, 내란 진압 등의 전투와 변경 지역의 방수(防戍)를 주된 임무로 하고 있었으나 각종 노역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이 밖에도 경군의 정용은 국왕 행차 시의 호가(扈駕)와 외국 사신의 영접(迎接) · 전송(傳送), 각종 창고 · 시장 · 가로(街路)의 요소(要所)에 대한 순검(巡檢) 등의 상경시위(上京侍衛)를 담당하였다. 특히 순검의 임무는 주로 금오위 소속의 정용이 맡았다.
한편, 경군의 정용은 해당 위의 장관인 상장군(上將軍)이 지휘했으며, 주현군의 경우는 지방관이 통솔하였다. 다만, 유사시에는 지방의 정용도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여러 문 · 무 관원의 지휘를 받았다.
정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종이 6위와 주현군에 모두 있었고, 병력의 규모 또한 비슷했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일반 농민을 주요 구성원으로 한 주현군의 정용이 번상(番上)을 하면 곧 6위의 정용이 되고, 반대로 6위의 정용이 하번(下番)을 하면 주현군의 정용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6위의 정용이 군반씨족(軍班氏族)에서 충원된 데 반해, 주현군의 그것은 하급 향리나 농민층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혀 별개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번상과 하번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고, 다만 형식적으로 6위에 편제되어 있는 망군정인(望軍丁人)의 일부만이 주현군의 정용이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1천명을 기본 구성으로 하는 영은 정규군인 정군방정인(正軍訪丁人)이고, 주현군의 정용과 보승이 망군정인으로, 현실적인 구성원이라기보다는 편제 상의 존재라는 견해이다.
정용을 군반씨족으로 보는 경우 정용 중 경군에 소속된 자들은 군역에 대한 대가로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았다. 즉 목종 때의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에서는 23결(結), 문종 때의 갱정전시과(更定田柴科)에서는 25결, 그리고 후기에는 17결의 토지를 분급받았다.
경군의 정용과 주현군의 정용의 관계에 있어 서로가 직결된다고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로 크게 구분된다. 그러나 같은 명칭을 가진 부대가 경군과 주현군에 동시에 있었다는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중앙정부의 군사적인 직접 지휘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