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향리 등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제도.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고려 전기
공포 시기
고려 전기
시행 시기
고려 전기~조선 중기
폐지 시기
1609년(광해군 1)
시행처
고려 왕조|조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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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기인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향리 등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제도이다. 기인 제도의 주요 목적은 중앙 권력의 강화에 있었지만,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호족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외관이 파견되면서 지방 세력의 견제라는 현실적 의미가 퇴색하였으며, 향리의 지위 하락에 동반하여 기인의 지위도 더욱 낮아졌다. 고려 후기 이래 기인이 각종의 노역에 동원되어 피역하는 기인들이 속출하였으나, 이러한 폐단은 개혁되지 못하고 조선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의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향리 등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제도.
내용 및 변천사항

고려 초기

기인 제도는 고려시대에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인데, 그 기원은 신라의 상수리제(上守吏制)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의 기인제는 태조가 후삼국을 정복 ·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태조는 자신이 호족으로서 궁예의 휘하에서 출세하였고, 호족들의 세력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했던 만큼 지방 세력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이에 지방 호족들의 독자적인 기반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사심관 제도(事審官制度)와 함께 기인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 호족들의 세력이 강대했던 만큼 이 정책이 태조에게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호족들은 자제를 보내어 수직(受職)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중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그 권위를 후광으로 하여 지방에서 세력 기반을 확고하게 할 수가 있었다.

고려 중기

성종에서 문종 대에 이르는 동안 문물 제도가 정비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됨으로써 호족은 향리(鄕吏)로 격하되어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사회적 지위도 점차 낮아지게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지방호족 출신인 기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인은 입역하는 동안 중앙 관아의 이속격(吏屬格)으로 잡무에 종사하였는데, 때로는 국왕의 시위(侍衛)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인은 그들 고향의 과거 응시자에 대한 신원 조사를 하거나 사심관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사심관을 중앙 관료 중에서 임명하면서도 중앙 정부가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향리층 출신인 기인의 추천에 따라서 임명한 것이다. 이는 중앙 정부가 기인과 사심관 제도를 향촌 사회의 자율적 질서를 고려하여 운영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기인의 입역(立役) 기간은 족정(足丁)은 15년, 반정(半丁)은 10년이었다. 이들은 7년의 입역을 마치면 동정직(同正職)을 받고 입역 기간을 완료하면 가직(加職)할 수 있었으며, 기인전(其人田)의 분급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기인의 역은 지방 세력이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출사로(出仕路)로 활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1106년(예종 1) 이후 외관(外官)의 최하 단위인 현(縣)에까지 감무(監務)가 파견됨으로써 기인의 본래 기능인 지방 세력의 견제를 위한 현실적인 의미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후기 이래로 향리의 지위가 더욱 하락하면서 기인의 처지도 한층 낮아지게 되었다.

고려 말기

고려 후기 이래 하락한 기인의 지위는 몽고과의 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기인은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몽고와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되고 농토는 피폐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몽골 복속기에 몽고의 과중한 공부(貢賦)의 요구는 고려의 주 · 현을 더욱 쇠퇴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정부의 수탈을 이기지 못해 점차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 유랑민의 증가는 조세 부족과 공역군(工役軍)의 감소를 가져왔다.

따라서 고종 때부터 노역이 가해지기 시작했던 기인을 정부(丁夫)로 동원해 궁실 조영 등에 사역시켰다. 그들은 궁궐의 건축과 수리뿐만 아니라 권문세가들의 사제(私第)를 짓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1318년(충숙왕 5)에 내려진 교서에서는 기인에게 부과된 부역이 노예보다 심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고려 후기 이후로 기인 제도는 일종의 천역 제도(賤役制度)로 변하였다. 기인 중에는 천역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이러한 피역(避役)이 발생하면 주군(州郡)에 피역으로 인한 벌금을 징수하면서 해당 향촌도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에 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기인 제도를 혁파하였다. 그러나 기인 제도의 혁파는 그만큼 기인의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이 되므로 국가 재원의 부족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자 1343년(충혜왕 4)에 부활시켰다.

조선시대

기인 제도가 부활한 뒤에도 기인이 노예처럼 사역되면서 여러 폐단이 발생하였는데, 여러 번의 혁파 논의에도 불구하고 기인 제도는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 태조는 즉위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기인 제도를 혁파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정종은 즉위 교서에서 기인을 없애는 것보다 합리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면서, 향리의 수를 참작해 액수를 정하고 향읍에 고르게 배정하도록 하였다.

이후 기인의 사역이 고려 말보다는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1416년(태종 16) 기인의 수를 490인으로 책정하고, 매년 정월 1일을 기준으로 1년 단위로 사역하되 네 번으로 나누어 번상(番上) 시켰다.

1422년(세종 4)에는 기인 490인 중 100인을 노자(奴子)로 대역(代役)하게 함으로써 그 수를 390인으로 줄였다. 1429년 향읍의 쇠잔과 성함에 따라 기인의 수를 다시 정하였는데, 경기는 향리 50인 중에서 2인, 경상 · 전라 · 충청 · 황해 · 강원 등에서는 30인에서 1인을 뽑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말에는 전란과 그 후유증으로 극도에 달한 노동력의 고갈을 보충하기 위해 기인의 사역에도 무질서한 감이 있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정국의 안정으로 상당히 질서 있게 합리적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 기인의 역종(役種)은 고려 말과 같이 궁사의 잡역 등이었는데, 그 후 기인역(其人役)은 기인을 각 도에 나누어 정해 소목(燒木: 탄목(炭木). 숯과 땔나무)을 상공(上供)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기인의 전업(專業)이 되어, 기인역이라 하면 으레 소목의 상공을 일컫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고려 때보다 더 떨어져 과거에도 각종 제한이 가해져서 응시할 수도 없는 처지까지 전락하게 되었다. 마침내 기인 제도는 1609년(광해군 1)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폐지되었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에 시행된 기인 제도는 향리의 자제를 볼모로 삼아 서울에 머물게 함으로써 향촌 세력을 견제, 통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기인 제도는 지방의 호족을 견제하고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지만,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호족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 고려 왕조의 중앙 집권화가 진전되면서 고려 후기 향리의 지위 격하에 동반하여 기인의 처지도 하락하였다. 기인 역의 고역화와 여러 폐단으로 인해 혁파 논의에도 불구하고 개혁되지 못하고 조선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기인 제도는 중앙의 정치 제도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고려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중앙과 지방 세력의 관계 변화를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연조귀감(椽曺龜鑑)』

단행본

채웅석, 『고려의 중앙과 지방의 네트워크』(혜안, 2019)
채웅석, 『고려시대 국가와 지방사회-‘본관제’의 시행과 지방지배질서-』(서울대출판부, 2000)
강은경, 『고려시대 호장층 연구』(혜안, 2002)

논문

한우근, 「여초의 기인선상규제」(『역사학보』 14, 역사학회, 1961)
김성준, 「기인의 성격에 대한 고찰」(『역사학보』 10·11, 역사학회, 1958·1959)
이광린, 「기인제도의 변천에 대하여」(『학림』 3,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54)
김유종, 「고려시대 기인제도의 운영과 기인의 위상」(『한성사학』 29, 한성사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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