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군은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에 지방의 농민을 징발하여 편성했던 후원부대이다. 공민왕 즉위 이후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을 대비하여 설치하였다. 서북면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1,000명을 1익으로 편성하였다. 10명을 지휘하는 통주, 100명을 지휘하는 백호, 1,000명을 지휘하는 천호를 설치하고, 유력가나 토호들을 천호·백호에 임명하였다. 남도지방에도 농민군·백정군(白丁軍)을 주축으로 익군을 설치해 전국적인 편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대량실업과 천호들의 농민수탈로 남부지방의 익군은 6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1274년(충렬왕 1) 원의 강요에 의해서 실시된 제1차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원의 익군 체제를 도입해 중군(中軍) · 좌군(左軍) · 우군(右軍) 등의 3군을 조직했던 것이 익군조직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 뒤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의 익군 조직은 원의 영향 아래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고 만호(萬戶) · 천호(千戶) 등의 병관(兵官)이 배치되면서 함께 편성되었던 것이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전개하면서 보다 새롭고 강력한 군사조직의 필요성 또한 절실히 대두되었다. 특히, 양계(兩界)지역의 경우 원의 지배로부터 수복했다고는 하지만 고려 초 주진군(州鎭軍)의 핵을 이루던 초군(抄軍) · 좌군 · 우군의 결여로 실질적인 통치력이 전혀 미치지 못한 데다가, 점증하는 원의 군사압력으로 원과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데 따라 익군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계지역의 유력가나 토호들을 천호 · 백호에 임명하고 이들로 하여금 농민 중심의 둔전군적 전투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이것은 양계의 독특한 사회지배구조를 현실적으로 인정, 이용하는 방법을 취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357년(공민왕 6)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도순문사 겸 서경윤 상만호(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로 삼고, 이듬해 서경(西京) · 안주(安州) · 삭방(朔方)에 만호부를 설치하였고, 1369년 서북면에 서경 · 안주 · 의주 · 이성(泥城 : 昌成) · 강계 등에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규모는 1천명을 1익으로 하여 모두 3만 2천명에 이르렀다. 익군 조직은 10명을 지휘하는 통주(統主), 1백명을 지휘하는 백호, 1천명을 지휘하는 천호가 획일적인 지휘계통을 가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당초 서북계에 국한되던 것이 1378년(우왕 4) 남도지방에도 농민군 · 백정군(白丁軍)을 주축으로 익군을 설치해 전국적인 편성을 기하였다. 그러나 익군 편성에 따른 농민의 대량실업과 천호들의 농민수탈로 공부차역(貢賦差役)이 불가능해져 이들 남부지방의 익군은 6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1392년(태조 1) 고려 말의 군목도체제(軍目道體制)를 계승해 서북면에는 평양도에 10익, 안주도에 10익, 의주도에 4익을 합해 총 24익을 설치하였다. 익마다 천호 1인이 배치되어 평시에 사졸을 훈련시키거나 또는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는 출격하는 체제였다. 1407년(태종 7) 군목도의 변천은 알 수 없으나 전체 14익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아 새로운 익군의 편성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424년(세종 6)에 평안도, 1425년에 함길도가 군익도 체제로 변경, 정비되었다. 이것은 각 익에 속하는 군현의 다소가 같지 않고, 군액(軍額)이 고르지 못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조처로서 시행되었다. 즉, 평안도의 경우, 전도를 평양도 · 안주도 · 의주도 · 삭주도 · 강계도 등 총 5군의 도로 나누고, 각 도는 중익(中翼) · 좌익(左翼) · 우익(右翼)으로 나누어 각기 소속 군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때 익군은 주력부대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평안도 전군액의 67.5%, 함길도 전군액의 75.1%가 익군이라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북방 양도의 모든 수령은 각 군익도 아래 군사직을 겸임하는 체제, 즉 행정과 군사가 일원화되는 직책으로서, 익군 역시 그러한 범주 내에서 조직되었다. 이렇게 동북면 · 서북면을 군익도 체제로 정비함으로써 고려 말 이래 익군 조직은 일단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1455년(세조 1) 군익도 체제는 전국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2년 후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게 된다. 이와 함께 전국의 지방군 조직도 처음 획일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즉, 1455년 북방 양도의 익군은 시위패(侍衛牌)와 통합되어 익속정군(翼屬正軍)으로 편제되었다가, 1459년 다시 남방의 정군(正軍), 시위패와 통합되어 정병(正兵)으로 합칭되는 대대적인 개편과정에서 익군은 소멸되었던 것이다.
익군은 고려 말 조선 초 북방 양도의 특수성으로 인해 국가적인 민호지배를 실시하지 못하고 사적 민호지배체제를 그대로 이용해 군사조직에 활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