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百戶)는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군직으로, 1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1281년(충렬왕 7)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둔 이래 각지에 설치된 만호부(萬戶府) 내에서 만호(萬戶) · 천호(千戶)의 휘하에서 1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공민왕대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력과 상관없이 각 진장(鎭將)의 품계를 나타내기 위해 국내의 무장들에게 백호직을 수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대 이후에는, 만호나 천호의 하급 지휘관으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에 설치된 순군(巡軍), 합포(合浦), 전라(全羅), 탐라(耽羅), 서경(西京) 등의 만호부에 모두 백호가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것의 품계나 정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1356년(공민왕 5)에 이들 만호부가 폐지되었는데, 이때 수여되었던 패부(牌符)가 회수되고, 관직 자체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58년부터 서북면의 서경 · 의주(義州) · 안주(安州) · 이성(泥城) · 강계(江界), 동북면의 함주(咸州) · 북청주(北靑州) · 갑주(甲州) · 길주(吉州) 등에 만호부가 다시 설치되면서 각 만호부의 천호와 통주(統主) 사이에 백호가 배치되어 지휘 계통을 구성하였다.
또한 1378년(우왕 4) 서북면의 익군(翼軍) 체제를 전국으로 확대해 각 도의 군익마다 5 · 6품의 관직으로 백호가 생겼으나, 이듬해에 동북면 · 서북면의 백호만을 남기고 모두 폐지되었다. 한편 1388년(우왕 14)에 수군만호부(水軍萬戶府)를 두었는데, 각 만호부의 하급 지휘관으로서 백호를 배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부터 동북면에 대한 경략이 본격화되고, 이듬해에 길주목(吉州牧), 단주(端州), 경성군(鏡城郡), 경원부(慶源府), 청주부(靑州府), 갑주 등의 지방 행정 단위가 마련됨과 동시에 길주목에는 6명, 나머지 지역에는 각각 4명의 정원으로 백호가 설치되었다. 한편 수군의 경우, 이해에 만호 · 천호 아래 5품 이상의 관직으로 백호가 정해졌으나, 1413년(태종 13) 수군의 직제가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동북면과 서북면의 경우도 1457년(세조 3) 군제가 군익도 체제(軍翼道體制)에서 진관(鎭管)으로 바뀌면서, 1459년 평안도 · 함길도의 정군(正軍)과 남도의 시위패(侍衛牌, 侍衛軍)가 정병(正兵)으로 일원화되었다. 동시에 백호는 대정(隊正), 여수(旅帥) 등의 관직으로 대체되고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