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거노비는 고려·조선시대에 관청이나 주인의 거주지로부터 떨어져 지내며 주어진 신공을 부담한 노비이다. 이들 외거노비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신역을 부담하였다. 고려시대 공노비 가운데 외거노비는 왕실이나 관청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였으며, 사노비 가운데 외거노비는 외방에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였다. 조선의 공노비 중 외거노비는 입역노비·봉족노비·납공노비로 구분되며 60세까지 신역을 부담하였다. 사노비에 해당하는 외거노비는 원방노비·원처노비라고 불렀는데, 주인인 상전에게 신공을 납부하였다.
역사상 노비가 출현한 초기 단계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의 구분만 있었고, 그들은 모두 노역(勞役: 노동력)을 부담하였다. 그러나 노비의 거주 지역이 소속 관청이나 주인의 거주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이와 같은 구분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공노비 가운데 외거노비는 왕실의 사고(私庫)인 요물고(料物庫)나 보흥고(寶興庫)에 소속된 토지나 여러 관청에 딸려 있는 공해전(公廨田) 등 국가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였다. 이들은 농경에 종사하면서 현물세를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공노비로서의 외거노비는 신역의 부담 형태에 따라 다시 입역(立役)노비 · 봉족(奉足)노비 · 납공(納貢)노비의 셋으로 구분되었다.
입역은 서울로 뽑혀 올라가 일을 하는 것이다. 입역은 7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였다. 입역노비는 일의 내용에 따라 다시 고위 관리를 시종하는 근수노(跟隨奴)와 관청의 잡무를 수행하는 차비노(差備奴)로 구분되었다.
봉족은 입역노비가 상경해 입역하는 동안 그의 생계를 돕는 것으로, 입역노비 1인에 대하여 2인의 봉족노비가 지급되었다.
납공은 직접적인 노동력 대신에 신공을 납부하는 것이다. 납공의 품목은 면포가 중심이었지만 점차 각 관청에 따라 다양해졌다. 신공액(身貢額)의 경우 노(奴)는 면포 1필과 저화(楮貨) 20장, 비(婢)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이었다. 저화가 잘 통용되지 못해 점차 노는 면포 2필, 비는 면포 1필 반으로 각각 고정되었다.
중앙 관청에 소속된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외거노비는 위 세 가지 신역 가운데 하나를 부담해야만 하였다. 그 가운데 입역노비가 가장 고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봉족노비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에서 요구하는 입역노비의 수가 증가하고 번차(番次)가 짧아짐으로써 입역은 더욱 힘든 것이 되었다. 따라서 생업인 농업에서 장기간 격리된 입역노비의 빈곤은 심화되어 갔다.
이와 병행해 입역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그들은 관리를 매수해 입역을 피하거나 서울 거주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입역을 대신하게 하였다. 여유가 없는 외거노비에게는 다른 곳으로의 도망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었다.
한편, 대립가(代立價)의 부담으로 입역노비가 파산하자, 국가에서는 대립(代立)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금지 정책이 피역자(避役者)를 더욱 양산시켰기 때문에 다시 대립을 공인하고, 그 대립가도 1개월에 면포 2필로 규정하였다.
또한, 도망한 노비를 찾아내기 위한 추쇄 작업을 20∼30년 주기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추쇄에 대한 노비들의 저항이 커지고, 추쇄자의 부정과 추쇄 정책을 펼쳐 나가는 봉건 지배층 자신의 도망노비 용은(容隱)이라는 모순된 행동 때문에 추쇄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노비의 도망은 계속되었으며, 이미 16세기에 입역노비는 크게 줄어들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사회 여건의 변화와 노비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외거노비의 신분 해방이 가속화되었다. 왜란과 호란에서 군공을 세워 양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전쟁 전후로 인적 · 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조정에서 실시한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나 납속종량(納粟從良) 등에 의해 노비 신분을 벗어나기도 하였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농업 · 수공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어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와 관련해 고용 노동의 일반화는 노비 신분 해방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인 도망을 보다 용이하게 하였다. 또한 부유해진 외거노비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 신분인 유학(幼學)을 모칭(冒稱)하고 족보를 위조하거나 본관을 사는 등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
외거노비의 전반적인 감소 추세 속에서 18세기 초엽에는 입역노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던 역할은 양인의 고용 노동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공노비로서의 외거노비는 모두 납공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남은 납공노비에게는 인징(隣徵) · 족징(族徵) ·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의 폐단이 발생해 그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도망을 다시 재촉하였다.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하는 납공노비의 수가 감소하자 국가는 다시 추쇄 작업을 실시하거나 신공액을 경감하기도 하였다. 도망이 보편화된 당시에 추쇄는 노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이 될 수 없었다. 이때 노비의 신공을 징수해 최소한의 재정을 확보하고자 비총법(比摠法)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도내의 노비 수를 일정하게 정하고 각 읍은 출생자의 다과(多寡)에 따라 각각의 신공액을 증감하지만 도 전체의 노비 수에는 변동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총법은 신공액의 과다한 책정, 노비수의 고정, 지방 하급 관리의 농간 등으로 결국 남은 노비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노비의 도망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미 1667년(현종 8)에 반필씩 내린 신공액을 1755년(영조 31)에 다시 반필씩 경감시켜 노는 1필, 비는 반 필로 하였다. 1774년(영조 50)에는 비의 신공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양반이 격증하고 노비가 격감하는 신분제의 변동 속에서 노비의 도망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납공노비는 더욱 감소되었다. 마침내 1801년(순조 1) 국가가 내시노비 자체를 혁파함으로써 공노비로서의 외거노비는 양인 신분으로 해방되었다.
고려시대 사노비 가운데 외거노비는 소유주와 떨어져 외지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경에 종사하였다. 외거노비는 솔거노비와는 달리 현 거주지를 확인시켜 주는 호적이 따로 더 있었지만, 살해를 제외하고는 주인으로부터의 가해 행위에 대해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외거노비는 독자적인 가계와 재산을 갖고 있어서 솔거노비보다는 경제적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조선시대 사노비로서의 외거노비는 일명 원방노비(遠方奴婢) · 원처노비(遠處奴婢)라고 불렀다. 주인인 상전에 대해서는 신공을 납부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1년의 신공액은, 노는 면포 2필, 비는 면포 1필 반이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토지 · 가옥, 심지어 노비까지 소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상전이나 다른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장(工匠)으로서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상업 · 어업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군역의 의무는 없었다.
다른 노비에 비해 비교적 유리한 처지에 놓인 그들도 신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도망을 가거나, 신공을 적게 부담하려고 소생(所生)을 숨기기도 하였다. 부유한 외거노비는 관리를 매수해 노비 신분을 벗어났으며, 자기 상전을 능멸하면서 신공을 바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그들의 상전은 대부분 서울의 양반 관리였다. 따라서 먼 곳의 외거노비를 관리, 통제하기 위해 주로 지방 수령의 협조를 얻어 노비에 대한 신공을 징수하거나 도망한 노비를 추쇄하였다.
그러나 도망한 외거노비의 결사적인 저항에 상전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들 사노비로서의 외거노비는 대부분 노비제가 법적으로 폐지되는 1894년보다 약 1세기 앞서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외거노비는 소속 관청이나 주인과 별도로 거주하면서 신역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경거노비나 솔거노비에 비해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외거노비로 중앙에 입역하는 노비들의 부담이 과도해지면서 대립 현상이 만연하였으며, 납공노비의 수가 줄어들면서 비총법이 시행되었다. 점차 입역노비의 역할이 양인 고용으로 대체되고, 납공노비의 신공액이 경감되었다. 외거노비들의 도망과 저항, 그리고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은 이들의 신분 해방을 가속화시켰으며, 결국 1801년 공노비로서의 외거노비는 양인 신분으로 해방되었다. 사노비로서의 외거노비 역시 도망을 비롯한 적극적 저항을 통해 점차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