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이 시행된 뒤, 과도한 군액의 책정으로 일반 가호에 돌려진 군역 부담자의 수가 늘어났다. 또 서울에서의 입번(立番) 중 여건도 악화된 가운데 대립(代立)이라는 변칙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일시에 서울에 머무르는 군사의 수가 늘어나 식량값이 오른 한편, 입번 중에 요구되는 것도 군사적인 것보다도 노역(勞役)이 많았다. 이에 보인(保人)에게 조역가(助役價)로 받아온 면포를 서울 거주인에게 주면서 대신 입역해줄 것을 부탁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 대립 현상은 당초에는 입번 군사의 편의 도모로 일어났다. 그래서 형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하고, 얼굴 모습과 나이를 새긴 둥근 패를 착용하게 하는 조처가 뒤따랐다. 그러나 곧 각 관서의 서리·노자(奴子) 등의 관속들이 오히려 군사들에게 대립을 강요하는 형태로 상황이 바뀌었다. 서리나 관속들은 대신 입역할 서울 거주인들을 다수 확보해두고 값을 높게 책정해 중간 이득을 얻고자 대립을 강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입번 군사가 보인에게 받아오는 법정 조역가(월당 1필)보다 몇 배나 되는 대립가를 공공연히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대립을 공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립가를 공정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는 지방 장시의 등장과 국제 무역의 성행 등의 상업 발달로 면포는 국내외적으로 중요 상품인 동시에 화폐의 기능까지 가지게 되었다. 정규적인 필단인 오승포(五升布) 외 삼승포·사승포의 상포(常布), 그 이하의 조포(粗布) 등은 그 자체가 화폐의 대소 단위를 이루는 것이었다. 상업의 발달로 인하여 이와 같이 면포의 화폐 기능이 컸기 때문에 대립가의 강제적인 징수가 더욱 심하게 행하여졌다.
세 차례의 공정가 책정은 법정 조역가를 참작해 책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대립가와는 거리가 멀어 고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실제의 대립가가 시기별로 큰 등락을 보인 것도 서울의 상업적 분위기 고조로 미가(米價)의 변동이 심했던 것과 관계가 있다.
대립가의 징수는 곧 군역이 포납화(布納化)하는 과정이었으며, 불법적인 과도한 징수는 족징(族徵)·인징(隣徵)까지 수반해 조선 전기 군사 제도의 붕괴를 더욱 재촉하였다. 중앙 각 관서의 선상노(選上奴)의 경우도 거의 비슷한 형태 대립가의 징수가 자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