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에 허적과 관련된 사건으로 남인이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은 숙종이 남인을 견제하려고 했던 데에 있다. 김석주를 이용해 남인을 견제하려던 숙종은 남인 허적이 기름 먹인 천막을 무단으로 사용한 일을 계기로 남인의 군권을 서인에게 주었다. 결정적으로 허적의 서자가 복창군·복선군·복평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삼복의 변’에 남인이 연루되며 허적, 윤휴 등 남인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 사건 이후 하나의 정치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경향이 생겼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사촌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견(堅)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 복선군(福善君) · 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도체찰사부는 효종 때까지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현종 때부터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쪽의 정성공(鄭成功) · 오삼계(吳三桂)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윤휴(尹鑴) · 허적 등의 주장이 제기되어, 1676년 정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허적은 훈련도감 · 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귀일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김석주측의 반대로 다음해 6월에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군영들은 예외적인 존재로 그것에 통속되지 않았다. 이 때 총융사와 수어사는 중앙군영의 하나였으나, 경기도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남인측이 나머지 두 중앙군영의 군권마저 이에 귀일시키려 하자, 김석주 등의 반발을 받은 것이다.
도체찰사부는 1678년 12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나,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실상 중앙군영들은 대부분 서인측에 의하여 창설, 발전되어 온 것이어서, 이에 관한 서인의 관심이 높았다. 이 사건 벽두에 중앙군영의 군권이 서인계에 전격적으로 넘겨진 것이나, 김석주가 서인과 제휴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역 혐의의 주된 내용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문제로 귀착됨에 따라, 이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자 모두가 연루되게 마련이어서 허견과 삼복(三福)뿐 아니라 허적 · 윤휴 · 유혁연 · 이원정(李元楨) · 오정위(吳挺緯)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의 연루자들에 대해서는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 시장을 옮겼다.”거나, “각 사 공물(貢物)을 많이 시장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통용하게 하여 그 값을 나누어 먹었다.”는 등 상인 및 상업과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정파의 어느 쪽이건 간에 당시의 정치가 경제의 새로운 변동에 영향을 받게 되는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시된다.
이 시기 이후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변모이다. 이 사건으로 도체찰사부가 혁파됨에 따라 대흥산성의 재물은 김석주가 관리청을 따로 세워 관리사로서 관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