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李楨)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다. 현종과는 사촌 사이이며, 숙종에게는 종숙(從叔)이 된다. 어머니는 복천(福川) 부부인(府夫人) 동복오씨이다.
복창군(福昌君)에 봉하여졌다. 형 복녕군(福寧君)이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 두 동생인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과 함께 ‘3복’이라 불렸다. 효종과 현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궁중에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1663년(현종 4) 사옹원 제조에 임명되고, 1668년 9월 진하사 겸 사은사 정사로 중국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종친으로서 왕실 및 외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행실에 문제가 있어 계속하여 신하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1665년에는 내수사에 바치는 용천(龍川)의 포(布)와 곡물을 멋대로 빼앗았다는 죄목으로, 1668년에는 경기 지방에 사냥을 나가 백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죄목으로 추고를 받았다. 기생을 끼고 궁중에 출입한다는 말이 돌아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차자(箚子)를 올리며 이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1673년 두 동생들과 함께 『황명통기(皇明通紀)』‧『십육조광기(十六朝廣記)』‧『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의 중국 역사서에 인조반정이 ‘찬역(簒逆)’으로 기록된 사실을 발견하고, 청이 『명사(明史)』를 찬술할 때에 이러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변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를 논의하던 중 대비 인선왕후(仁宣王后)에 이어 현종까지 승하하면서 변무는 이뤄지지 못하였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사은사 겸 동지사로 청에 다녀오는 등 이전부터의 외교 업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아직 어리고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복창군을 비롯한 인평대군의 아들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특히 ‘3복’이 남인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이들의 정치적 세력화를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복창군이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675년 3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金佑明)이 소를 올려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궐에 출입하며 궁녀와 간통하였다고 고발하며, 이른바 ‘ 홍수의 변(紅袖之變)’을 일으켰다. 이후 이들의 처벌을 두고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결국, 명성왕후의 증언으로 간통은 사실로 인정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몇 달 후 석방되어 1677년(숙종 3)에는 진주사로 중국 청나라에 파견되는 등 외교적 역할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복창군의 존재가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환국 정국 속에서 붕당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언제든지 다시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다.
결국,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인해 이른바 ‘3복의 옥’이 일어나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