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전적, 찰방,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양직(養直)
사양재(四養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0년(숙종 16)
사망 연도
1778년(정조 2)
본관
진주(晉州)
주요 저서
상봉록|주서분류
주요 관직
지중추부사
내용 요약

강호보는 조선 후기 전적, 찰방,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727년 연행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행록 『상봉록(桑蓬錄)』을 저술하였으며,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문적으로는 남당 한원진으로부터 수학하여 노론 호론 계열로서 정통주자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정의
조선 후기 전적, 찰방,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직(養直), 호는 사양재(四養齋). 강진휘(姜晉暉)의 증손이며, 현종대 예조정랑‧찰방 등을 지낸 강석규(姜錫圭)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강석규의 측실(側室)로, 김성급(金成岌)의 딸이다.

주요 활동

강호보가 6세 때인 1695년(숙종 21) 아버지 강석규가 죽었으으며, 8세부터 주1 강석붕(姜錫朋)에게 글을 배웠다. 1702년 경기도 회시(會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무적(無籍)’을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고, 1726년(영조 2) 생원시에 1등으로 입격하였으나, 경학에 뜻을 두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1727년(영조 3) 아버지의 문인이었던 이세근(李世瑾)을 따라 연행에 참여하여, 정환(鄭煥)과 백수채(白受采) 등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만났다. 두 학자와의 교류는 연행 이후에도 서신을 통해 계속되었다. 『상봉록(桑蓬錄)』이라는 연행록을 저술하여 이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1754년(영조 30) 노모의 뜻에 따라 국왕 영조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한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여,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시(殿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전적, 유곡찰방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주2되었다.

학문과 저술

증조할아버지 강진휘가 성혼(成渾)의 문인이었고, 강호보에게 연행을 권유한 이세근 또한 소론이었던 것을 보면, 강호보의 가계는 서인 중에서도 소론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호보는 20대 중반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면서, 송시열(宋時烈)에서 권상하(權尙夏)를 거쳐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노론 주3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학문적으로 이단(異端)과 이설(異說)을 강하게 비판하고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을 확정하려 하는 정통 주자학자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으며, 조선 사회의 개혁에 대해서도 주4을 지지하는 등 호론계 학자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저서인 『 주서분류(朱書分類)』는 주자의 편지를 방대하게 고찰하여 주제에 맞춰 분류하고, 주자의 만년정론(晩年定論)을 확정하려 하였으며, 강호보의 학문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727년 연행의 경험을 담은 『상봉록』은 본래 한문으로 저술되었으나, 원본은 분실되고 어머니를 위해 지은 『상봉녹』(언해본)과 증손자 강재응(姜在應)이 언해본을 바탕으로 한문으로 재번역한 『상봉록』(한역본)이 남아 있다. 문집으로는 『췌언(贅言)』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논문

김영죽, 「姜浩溥의 『桑蓬錄』을 통해 본 교유의 일단」(『동방한문학』 60, 동방한문학회, 2014)
정내원, 「漢譯本 연행록 『桑蓬錄』의 특징과 漢譯 양상 연구」(『동양고전연구』 55, 동양고전학회, 2014)
구만옥, 「18세기 정통주자학자(正統朱子學者)의 현실인식과 학문적 대응 : 사양재(四養齋) 강호보(姜浩溥)(1690~1778)의 저술을 중심으로」(『한국사상사학』 31, 한국사상사학회, 2008)
주석
주1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아저씨뻘이 되는 사람.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주로 행하였다.    우리말샘

주3

조선 말기, 성리학파(性理學派) 가운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한 파.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하였다.    우리말샘

주4

조선 후기에, 마을의 호(戶)를 기준으로 양반과 일반 백성에 관계없이 군포를 평등하게 징수하려고 한 정책. 군역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제기되었다. 양반층의 반대에 부딪쳐 표류하던 정책을 고종 8년(1871)에 흥선 대원군이 시행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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