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양직(養直), 호는 사양재(四養齋). 강진휘(姜晉暉)의 증손이며, 현종대 예조정랑‧찰방 등을 지낸 강석규(姜錫圭)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강석규의 측실(側室)로, 김성급(金成岌)의 딸이다.
강호보가 6세 때인 1695년(숙종 21) 아버지 강석규가 죽었으으며, 8세부터 족숙(族叔) 강석붕(姜錫朋)에게 글을 배웠다. 1702년 경기도 회시(會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무적(無籍)’을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고, 1726년(영조 2) 생원시에 1등으로 입격하였으나, 경학에 뜻을 두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1727년(영조 3) 아버지의 문인이었던 이세근(李世瑾)을 따라 연행에 참여하여, 정환(鄭煥)과 백수채(白受采) 등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만났다. 두 학자와의 교류는 연행 이후에도 서신을 통해 계속되었다. 『상봉록(桑蓬錄)』이라는 연행록을 저술하여 이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1754년(영조 30) 노모의 뜻에 따라 국왕 영조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한 증광시(增廣試)에 응시하여,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시(殿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전적, 유곡찰방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증조할아버지 강진휘가 성혼(成渾)의 문인이었고, 강호보에게 연행을 권유한 이세근 또한 소론이었던 것을 보면, 강호보의 가계는 서인 중에서도 소론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호보는 20대 중반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면서, 송시열(宋時烈)에서 권상하(權尙夏)를 거쳐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노론 호론(湖論)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학문적으로 이단(異端)과 이설(異說)을 강하게 비판하고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을 확정하려 하는 정통 주자학자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으며, 조선 사회의 개혁에 대해서도 호포론(戶布論)을 지지하는 등 호론계 학자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저서인 『 주서분류(朱書分類)』는 주자의 편지를 방대하게 고찰하여 주제에 맞춰 분류하고, 주자의 만년정론(晩年定論)을 확정하려 하였으며, 강호보의 학문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727년 연행의 경험을 담은 『상봉록』은 본래 한문으로 저술되었으나, 원본은 분실되고 어머니를 위해 지은 『상봉녹』(언해본)과 증손자 강재응(姜在應)이 언해본을 바탕으로 한문으로 재번역한 『상봉록』(한역본)이 남아 있다. 문집으로는 『췌언(贅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