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1년(숙종 7)에 출생하여 22세인 1702년(숙종 28)에 홍세태(洪世泰)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다. 스스로 "한미하다"고 표현한 것이나, "위항(委巷)에서 일어났다"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까지 문명(文名)을 날리지 못하였던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동생 정민교와 함께 유업(儒業)에 힘썼다. 신정하(申靖夏)를 통해 김창협(金昌協)의 학설을 배워 김창흡(金昌翕)에게서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1705년(숙종 31)에는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에 역관으로 함께 참여하였고, 1717년(숙종 43)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중장년기에는 대체로 관직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주로 노론 계열의 인물들과 교유하였기 때문에 노론이 화를 당한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에는 가족들과 함께 계룡산 완암곡(浣巖谷)으로 피신하였다. 50이 넘은 늦은 나이에 승문원 제술관, 통례원 인의, 귀후서 별제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사(詩社) 활동을 통해 사대부, 여항시인, 평민가객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문학으로 명성을 얻어 당대의 사대부들로부터도 존중을 받았다. 홍낙명(洪樂命), 홍봉한(洪鳳漢), 김종후(金鍾厚), 김종수(金鍾秀) 등 당대의 명사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정내교의 문학은 천기론(天機論)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의식을 담은 시, 사회적으로 미천한 여항인들을 다룬 전(傳)을 통해 조선 후기 여항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저술로는 『 완암집(浣巖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