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항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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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가잡영 / 본문 첫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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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
개념
조선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ㆍ서얼ㆍ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양식. 여항문학.
이칭
이칭
위항문학(委巷文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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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ㆍ서얼ㆍ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양식. 여항문학.
내용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한다. 한문학은 양반사대부들이 한자를 빌려 그들의 정서와 생활감정을 표현한 상층계급의 예술활동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부터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상인 · 천인까지 포함하는 하급계층이 한문학 활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한문학 활동이 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당시에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委巷人)이라 지칭한 예에 따라 편의상 위항문학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위항문학 활동은 주로 한시를 매개로 전개된다. 한시는 시조와 함께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었다. 한시는 당대 국문학의 장르라 할 수 있는 서정민요 · 서정무가 · 서정잡가 등의 상민의 문학장르와는 구별되며 상류계층의 문화적 요구를 만족시킬 필요에서 성립되는 문학장르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몇몇의 예외는 있었지만, 학계와 문단은 양반전유의 장이었다. 시사(詩社)는 그들만의 조직이고 시집(詩集) 역시 그들의 것이었다. 양반으로 제한된 문원(文苑)의 풍토에 일군의 위항시인(委巷詩人)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16세기 중반이 그 시초이고 17세기의 준비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에 와서는 위항문학을 통한 신분상승운동으로까지 확산되고 고무되어 위항문학운동의 절정기를 이룬다. 18세기 말 옥계시사(玉溪詩社, 일명 松石園詩社)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룬 위항문학운동은 19세기 중반 소규모의 시사로 분화, 전승되어 위항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의 구실을 수행하다가 19세기말 개항기에 육교시사(六橋詩社)에 이르러서는 개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위항문학 활동의 내용은 첫째 시사의 조직, 둘째 공동시집의 발간, 셋째 공동전기를 중심으로 한 중인역사의 정리로 요약할 수 있다. 시사의 조직은 17세기말 숙종 때의 임준원(林俊元)을 맹주로 한 낙사시사(洛社詩社)를 필두로 18세기말 정조 때의 옥계시사의 조직이 본격적인 것이다. 그 맹주는 천수경(千壽慶)이다.

그의 집 송석원(松石園)이 이들 시 동인들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송석원시사로 별칭되기도 한다. 옥계는 인왕산에 있던 시내이다. 옥계시사의 주요동인이던 장혼(張混) · 김낙서(金洛瑞) · 왕태(王太) · 이경연(李景淵) 등이 모두 이 부근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돌아가며 시회(詩會)를 열어 상호 분발하고 탁마(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하였다.

봄 · 가을 좋은 날을 택하여 오늘날의 백일장에 해당하는 백전(白戰)이라는 시경연대회를 열었다. 수백 명씩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백전은 당대 위항문사(委巷文士)들의 큰 잔치였으며 위항문학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박윤묵(朴允默) · 이의수(李宜秀) · 김태욱(金泰郁) · 노윤적(盧允迪) · 조수삼(趙秀三) · 차좌일(車佐一) 등도 옥계시사의 중요한 시인들이다. 이 중에서 박윤묵 · 조수삼 등은 19세기 중반까지 생존하여 다음대 후배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9세기 전반의 소규모 시사들이 분립한 곳도 바로 이 인왕산 기슭이다.

서원시사(西園詩社, 주요동인은 池錫觀 지석관 · 金義齡 김의령 · 朴基悅 박기열 · 柳基成 유기성 · 曺景軾 조경식 · 朴基淵 박기연 · 金永冕 김영면 · 劉定柱 유정주 등) · 비연시사(斐然詩社, 주요동인은 張之琬 배지완 · 張孝懋 장효무 · 林瑜 임유 · 高晉遠 고진원 · 柳起 유기 등) · 직하시사(稷下詩社, 주요동인은 崔景欽 최경흠 · 劉在建 유재건 · 趙熙龍 조희룡 · 李慶民 이경민 · 朴膺模 박응보 등)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1870년대 말 개항 직후에 결성된 육교시사(六橋 육교는 청계천2가에 있는 일명 水標橋 수표교의 별칭으로 청계천 하류에서 여섯 번째 다리라는 뜻이다.)는 장소가 중인계층의 집단거주지인 청계천 2가 부근이다.

장소가 서울의 중앙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그 주도인물도 전대의 경아전(京衙前 : 규장각의 書吏들이 핵심이 되었음.) 중심에서 기술직중인(技術職中人, 세칭 醫譯中人)으로 대체된다.

맹주는 강위(姜瑋)이다. 변진환(邊晉桓) · 백춘배(白春培) · 김재옥(金在玉) · 이명선(李鳴善) · 함혜영(咸蕙永) · 배전(裵㙉) · 이용백(李容白) · 박승혁(朴承0x9381) · 유영표(劉英杓) · 이기(李琦) · 고영철(高永喆) · 고영선(高永善) · 고영주(高永周) · 현은(玄隱) · 김경수(金景遂) · 김득련(金得鍊) · 이전(李㙉) · 지운영(池運永) · 지석영(池錫永) · 박영선(朴永善) · 변위(邊煒) · 변정(邊烶) · 김석준(金奭準) · 김한종(金漢宗) · 황윤명(黃允明) 등이 중요한 동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의역중인출신이다.

전대의 시사들이 위항문학 운동을 통한 신분상승 운동을 꾀하고 그 구성원들은 위항문사 · 위항시인으로 자족하였다. 그러나 육교시사에 이르러서는 북학(北學)의 종장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성장한 의역중인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북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위항지사(委巷之士)로서 당대의 시무(時務)인 개화에 열중하는 개화파로 부상하여 개항 후의 정국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면서 개화정책 수행에 막후역할을 담당하였다. 공동시집 간행의 단초는 1668년(현종 9) ≪육가잡영 六家雜詠≫이다.

최기남(崔奇南) · 남응침(南應琛) · 정예남(鄭禮男) · 김효일(金孝一) · 최대립(崔大立) · 정남수(鄭枏壽) 등 여섯 사람의 위항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집이다. 이보다 한 단계 진전된 것이 1712년(숙종 38)에 홍세태(洪世泰)에 의하여 간행된 ≪해동유주 海東遺珠≫이다.

이는 홍세태가 김창협(金昌協)의 협조를 얻어 10여 년 동안 위항에 널리 구하고 모아 48가 230여 수의 시를 1책으로 묶은 공동시집으로 본격적인 위항시집의 효시가 된다. 1737년(영조 13)에는 고시언(高時彦)에 의하여 ≪소대풍요 昭代風謠≫가 간행되었다. 본격적 위항공동시집의 표본이다.

162가의 작품을 시체별로 편집, 9권 2책으로 엮었다. 이를 계기로 환갑마다 공동시집을 발간하는 불문율이 생겨 60년 후인 1797년(정조 21)에 ≪풍요속선 風謠續選≫이 간행되었다. 전기한 옥계시사의 송석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333명의 위항시인의 시작품 723수를 운각활자(芸閣活字)를 사용하여 3책으로 찍어내었다.

60년이 지난 1857년(철종 8) 직하시사가 주도하여 ≪풍요삼선 風謠三選≫이 나왔다. ≪풍요속선≫ 이후 배출된 305명의 시인의 작품을 수집, 망라하여 7권 3책으로 편찬하였다. 최경흠 · 유재건이 공편하였다. 120년 전 간행된 ≪소대풍요≫가 이미 멸실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100여 본을 중간하였다.

공동전기의 발간은 전기한 두 사항에 비하여 상당히 후기에 이루어졌다. 19세기 중반 직하시사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된 ≪호산외사 壺山外史≫ ·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 · ≪희조일사 熙朝軼事≫ 등이 그것이다. ≪호산외사≫는 ‘호산외기(壺山外記)’로도 표기된다. 조희룡에 의하여 1844년(헌종 10) 간행되었다.

연대순으로 39명의 위항인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1권 1책으로 엮었다. ≪이향견문록≫은 18년 후인 1862년에 같은 직하시사 동인인 유재건이 284항목 308명의 위항인전기를 10권 3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조희룡의 서문과 편자인 유재건 자신의 의례(義例) · 목차 · 인용서목의 순서로 된 짜임새 있는 체재로 꾸며져 있다.

4년 후 1866년(고종 3) 같은 직하시사 동인 이경민은 자신의 서재인 운강서옥(雲崗書屋)판으로 ≪희조일사≫ 상하 2권 1책을 펴냈다. 95명의 위항인들의 집단전기이다.

이 공동전기의 간행은 공동시집과는 달리 직하시사 동인들의 개인적 노력의 소산이며 양반사대부같이 본격적인 문집을 낼 여력이 없던 위항인들의 행적을 한데 모아 조명함으로써 후배 위항인들을 분발하고 격려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동시집의 간행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희조일사≫가 시기적으로 늦은 것은 18세기의 문예부흥기를 거쳐 정리할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정사에서 소외된 위항인들의 자기역사의 정리라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나온 ≪규사 葵史≫ · ≪연조귀감 㙉曹龜鑑≫과 같은 궤를 이룬다.

≪규사≫는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達西精舍)에서 간행된 서얼들의 자기역사의 집대성이다. ≪연조귀감≫은 향리의 역사서로 월성이씨라는 대표적 향리가문의 3대에 걸친 가사(家史)이다. 위항문학 활동은 19세기 말의 격동기를 거쳐 망국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처하여 중단되었다.

1917년 공동시집발간의 환갑 해가 되자 ≪풍요사선 風謠四選≫ 간행이 논의된다. 그러나 다수 중인출신 인사들의 거부에 의하여 무산된다. 반상을 타파하고 평등사상에 입각한다는 취지 아래 통시적 범계급적 편집방침을 내세운 ≪대동시선 大東詩選≫이 장지연(張志淵)에 의하여 12권 6책으로 간행된다. 제5책의 9권, 10권에 ≪풍요삼선≫ 이후의 위항시인들이 실려 있다.

같은 시기에 장지연에 의하여 공동전기 ≪일사유사 逸士遺事≫가 편집되어 1922년 간행되었다. 전 시기인 19세기 중엽의 삼서(호산외사 · 이향견문록 · 희조일사)를 재편집한 것이다. 그 이후의 인물은 전혀 정리하거나 수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신분상승을 이룩하여 더 이상 구차스러운 방편이었던 위항문학 운동에 편승할 필요가 없었고 자신들의 출신배경을 구태여 들추어내기를 꺼려한 때문으로 해석된다.

18세기 이래로 위항문학 운동 · 서얼통청 운동(庶蘖通淸運動 : 서얼들의 신분상승운동)을 통하여 신분상승을 도모하던 위항인을 포함하는 중인계층은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하고 퇴색해 가는 양반사대부 문화를 대체하는 중인문화를 키웠다. 그들은 갑오경장 · 국권상실의 격변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문화운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해동유주(海東遺珠)』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
『호산외사(壺山外史)』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희조질사(熙朝軼事)』
『일사유사(逸士遺事)』
『재각집(在閣集)』
『이이엄집(而已广集)』
『조선평민문학사』(구자균, 민학사, 1974)
「조선후기의 문풍(文風)과 위항(委巷)문학」(정옥자, 『한국사론』 4, 1978)
「시사(詩社)를 통해서본 조선말기 중인층」(정옥자, 『한우근박사정년기념논총』,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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