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시사(六橋詩社)는 1876년부터 188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간 한양의 육교(六橋)를 중심으로 중인 신분이었던 역관 동인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 시사이다. 특정 한 곳에서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고 동인들의 거처를 돌아가면서 모임이 이루어졌다. 사행(使行)의 송별과 환영, 특별한 절기, 회갑 · 돌 등 경조사 등이 있을 때마다 모임을 가지고 시를 지었으며, 국내외 정세를 고민하며 담론을 나누었다. 관련 자료로 강위가 육교시사의 동인들과 함께하며 지은 시들을 모은 시집인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이 전한다.
육교시사(六橋詩社)는 18761877년 1월경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강위(姜瑋, 18201884)를 중심으로, 김경수(金景遂, 1818~?) · 박영선(朴永善, 1828~?) · 김석준(金奭準, 18311915) · 고영철(高永喆, 1853?) · 김득련(金得鍊, 18521930) · 변수(邊燧, 18611891) · 이기(李琦, 18551935) · 현은(玄櫽, 1860?) · 지운영(池運永, 18521935) · 지석영(池錫永, 18531935) 등 70여 명의 주1들이 참여하였다. 동인들 중 다수의 주거 공간이 주2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시사 모임을 ‘육교시사’라고 하였다.
학문적 역량과 문학적 역량으로 당대에 널리 알려진 강위의 지도를 받기 위해 서울과 지방의 인사들이 모여들면서 시사 모임이 결성되었으며, 중인 역관 계층의 혼인 등을 통해 연결된 관계망을 중심으로 동인들의 수가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교시사는 강위 생전에는 번성하였으나 강위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명맥만 유지하던 육교시사는 김득련이 중국 · 일본 등 8개국을 견문하고 지은 한시를 엮은 『환구음초(環璆唫艸)』의 저술과 간행을 계기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김득련과 김석준의 교유 인물이 새로운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김석준을 중심으로 육교시사의 전통을 계승하여 활동을 지속하였다.
육교시사에서는 75회 가량의 시사 모임이 이루어졌다. 육교시사의 모임은 특정한 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동인들의 거처를 돌아가면서 모임이 이루어졌다. 육교시사의 동인들은 사행(使行)의 송별과 환영, 인일(人日) · 상원 · 동지 · 춘진일(春盡日) 등의 특별한 절기, 동인이나 그 가족들의 회갑 · 돌 등 경조사 등이 있을 때 수시로 만나 시를 지었으며 국내외 정세를 고민하며 담론을 나누었다.
또한 육교시사의 동인들은 당시 영선사 · 수신사 · 보빙사 등에 다수 참여하였고, 통리기무아문 · 동문관 · 『한성순보』 발행 등 개화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선진 문화의 수입과 사회 계몽 · 개혁 의지를 가지고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강위가 육교시사의 동인들과 함께하며 지은 시들을 모은 시집인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이 전해져서, 육교시사에 참여한 동인, 활동 시기 및 활동 공간, 구체적인 활동 상황 등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