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사는 개항기에 최초로 청나라에 파견한 유학생 인솔 사행이다. 1881년 순천부사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무기제조법을 배워오기 위해 파견되었다. 유학생의 수는 학도 20명, 천인 신분 공장 18명 등 총 38명이었다. 학습 내용에는 톈진기기국에서 화약·탄약의 제조법을 비롯해 전기·화학·제도·제련·기초 기계학 등은 물론 외국어의 학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학습은 임오군란으로 유학생이 조기 귀국하면서 종료되었다. 영선사의 또 다른 임무는 연미사 파견에 관한 사전교섭이었는데, 8차례에 걸친 회담을 통해 1882년 제물포에서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낳았다.
김윤식(金允植)이 담당한 영선사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부여되어 있었다. 무비자강책 실현을 위한 신무기에 관한 학습과 연미사(聯美事)에 관한 사전 교섭이었다. 신무기를 비롯한 서구 문물은 개항 직후부터 고종과 초기 온건개화파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친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본 파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 등 일련의 개화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실행된 영선사의 파견은 무비자강과 능동적인 개항책의 추진이라는 의미가 부각된다.
영선사 파견의 직접적인 계기는 1879년(고종 16) 8월에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이 청나라로 가는 헌서재자관(憲書賫咨官) 이용숙(李容肅) 편에 신식 무기의 학습 내지 수입 가능성을 타진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의도를 알게 된 청나라의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直隷總督兼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조선 정부의 정식 요청이 있을 경우 톈진(天津)에 있는 기기국(機器局)에서 무기제조법을 학습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군사 훈련도 가능하다는 회답을 보냈다. 회답을 받은 조선 정부에서는 다음 해인 1880년 4월에 조정 회의를 거친 다음, 11월에 변원규(卞元圭)를 파견해 정식으로 무기제조법의 학습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의거해 이홍장은 광서제(光緖帝)의 재가를 얻어 그 해 9월 구체적인 세목을 정하였다. 이것이 곧 「대조선의제기연병각조(代朝鮮擬製器練兵各條)」이다. 이러한 세목을 바탕으로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 4조가 결정되었다. 이 각조와 장정에서는 조선 정부에서 요구한 무기 제조의 학습뿐만 아니라 40명의 군인을 유학시키는 문제와 조선군 3만 명의 무장에 필요한 각종 무기가 22만 1400냥으로 계산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교섭 결과는 그 해 11월 1일 조선 정부에 알려지고 이에 따라 유학생 파견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12월에 이르러서 허원식(許元栻) · 이준선(李駿善) 등이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이 지적한 것은 기예북학(技藝北學)의 부당성과 더불어 외적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 재정 문제의 곤란성 등이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다음 해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에 명해 영솔사신의 칭호와 유학생 파견의 제문제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칭호를 영선사라 하고 우선 공도(工徒)를 파견해 무기제조법의 학습만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조용호(趙龍鎬)를 영선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해 윤7월 15일에 조용호가 병사함으로써 순천부사(順天府使) 김윤식이 임명되었다. 또 영선사 일행이 출발한 9월 26일까지 다섯 차례나 출발 일자가 변경되는 난항이 계속되었다.
청나라측이 제시한 유학생의 수는 38명이다. 이 중에서 중인 이상의 신분 20명을 학도(學徒)라 했고, 천인 신분 18명을 공장(工匠)이라 하였다. 영선사 일행은 이 밖에 관원 · 통사(通事) · 수종(隨從) 등 모두 69명이 정식 인원이며, 유학생의 수종도 14명이 있었다.
영선사 일행은 그 해 9월 26일 출발해 10월 26일에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에 도착하였다. 이때 김윤식은 일행의 행동규범과 벌칙을 작성, 공포했는데, 그것이 「영선행중절목(領選行中節目)」 15조이다. 일행이 북경에 당도한 것은 11월 17일이다. 김윤식은 이홍장과 회담하기 위해 보정부(保定府)로 가고 유학생 일행은 30일에 톈진기기국에 도착하였다. 김윤식이 12월 1일까지 세 차례에 걸친 이홍장과의 회담을 마치고 톈진에 도착한 것은 12월 6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연말이 가까워졌고 또한 청나라 측 위원들이 유학생의 능력을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분창(分廠)이 지연되었다. 다만 학도 4명과 공장 1명이 수사학당(水師學堂)과 수뢰학당(水雷學堂)에 입당했을 뿐이다. 다음 해인 1882년 1월 8일에 기기국의 동남 양국이 개공(開工)함에 따라 유학생의 분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월 초까지도 완전한 분창이 실시되지 않아 2월 11일을 기준으로 보면 28명[학도 12명, 공장 16]만이 학습에 종사하고 있다.
유학생의 학습 내용에는 화약 · 탄약의 제조법을 비롯해 이와 관련 있는 전기 · 화학 · 제도(製圖) · 제련 · 기초 기계학 등은 물론 외국어의 학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학도들이 학습한 것은 주로 화학 · 전기 · 제도 · 화학제조법 및 외국어 등 이론적인 분야였다. 공장들이 학습한 것은 제련 · 기계조작법 및 기계모형의 제조 등 실험적인 분야가 중심이었다. 학습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 유학생들이 귀국 이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규모가 작은 소수기기(小手機器)의 학습론도 대두되었다.
유학생의 학습 상황을 보면, 남국(南局)의 경우 전기창(電氣廠)의 안준(安浚) · 상운(尙澐), 화도창(畫圖廠)의 안욱상(安昱相) · 조태원(趙台源) 등이 학업에 정진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반면, 특히 동국(東局)에 분창된 유학생에 대해서는 동국총판(東局總辦) 반준덕(潘駿德)이 무성의와 무재(無才)를 들어 혹평하였다.
5월 초까지 유학생의 반수인 19명이 신병 · 무재 · 유고(有故) 등 이유로 중도귀국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학습이 성공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또, 영선사행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로서 대두된 것은 재정의 결핍이었다. 경비는 본국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송달된 것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관호전장(官號錢莊)인 화풍국(和豐局)에서 차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월 말경에 이르자 이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뒤 톈진에 있는 화유국(華裕局)에서 고평은(庫平銀) 1만 냥을 차용해 일시 경비에 충당했으나 항상 재정적 곤궁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유학생의 조기 철환을 모색하게 되었고, 따라서 5월 말에는 본국의 설창 계획이 점차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야기된 것이 임오군란이다. 군란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학습은 중단되었고 유학생들은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란 소식이 전해진 것은 6월 18일이다. 김윤식은 학도 2명을 대동하고 7월 7일 귀국했고, 톈진에 잔류한 유학생은 15명이었다.
그 뒤 김윤식은 9월 24일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잔류 유학생의 귀국 문제와 본국 설창을 위한 무기구입 문제를 이홍장과 협의해 약 5,000냥 상당의 소수기기를 구입하였다. 김윤식은 10월 16일 잔류 유학생을 영솔해 톈진을 출발, 엔타이(煙臺)를 거쳐 11월 1일인천에 도착하였다. 무비자강의 이상 아래 신무기의 학습이라는 임무를 띠고 출발한 영선사행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83년 3월 삼청동 북창(北倉)에 최초의 기기창(機器廠)을 창건하는 기초가 되었다.
김윤식의 사명 중 ‘연미사’에 관한 사전 교섭은 신무기에 관한 학습과 함께 외교적으로 중대한 일이었다. 조선 정부가 연미론(聯美論)에 대해 긍정적인 정책 전환을 모색한 것은 경진수신사(庚辰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주일청국참찬관(駐日淸國參參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들어온 다음부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전환의 이면에는 그동안 이홍장이 조선 정부에 대해 꾸준히 연미론을 종용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김윤식은 11월 28일에 이홍장과 제1차 회담에서 그의 사명이 연미사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 후 11월 30일, 12월 1 · 19 · 26일, 1882년 2월 17일, 3월 4일 등 모두 8차에 걸쳐 회담을 가졌는데, 연미사가 논의의 중심이었다. 김윤식은 제2차 회담에서 척화론이 팽배하고 있는 본국 정세를 감안해 중국 황제의 조약 체결을 위한 칙령을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였다. 제3차 회담 이후에는 전권대표의 파견 문제, 조약 초안의 검토, 미국 사신의 내조문제(來朝問題) 등을 협의하였다.
이러한 교섭 결과, 문의관(問議官)으로 어윤중(魚允中)과 이조연(李祖淵)이 파견되어 연미사는 더욱 진전되었다. 마침내 1882년 4월 6일, 제물포에서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윤식이 영선사로서 톈진에 머물고 있는 동안 “연미에 관한 일이 십중팔구였으며 학습에 관한 일은 한 둘에 불과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연미에 관한 사명에 더욱 몰두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