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순필(舜弼). 호는 삼원당(三元堂).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4년(고종 1) 정시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의 정언을 지냈다. 1880년(고종 17)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황준헌(黃遵憲)의 저술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국왕에게 바친 뒤 사본이 널리 유포되었다.
그런데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유지하며, 1876년 개항 이래 시행된 중앙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던,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이 성현을 모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김홍집을 탄핵하고 정권의 실정을 맹렬히 공박하였다.
이때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1880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첫 번째 상소에서 우선 국가재정의 위기와 민심의 이반(離叛)을 지적하고, 원인을 이서배(吏胥輩)의 혹심한 중간수탈과 세납곡물을 운반하는 조선(漕船)의 선주가 저지르는 각종 부정행위 등에서 찾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국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재정립을 요구하였다.
또, 근래에 사치풍조가 극심하여지는 까닭은 개항 이후 부상(富商)들이 외국상인과 곡물의 밀무역을 통해 외국의 사치품을 구입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이를 엄금할 것을 주장하며 개항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였다.
두 번째 상소에서도 지방관과 이서배들의 수탈로 인한 민생의 어려움을 개탄하였으며, 이어 인천항의 개항에 대해 극력 반대하였다. 인천 개항시 외국의 사치품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쌀·포(布)·물고기·소금 등이 유출되어 서울의 10만 가구가 굶주리게 될 것이라고 하며, 개항을 통한 통상무역의 불필요와 함께 자급자족적 검약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책략』의 내용 중 멀리 떨어진 미국이 러시아의 침입시 우리를 구원하여 준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며 러시아가 우리를 침략할 이유도 없다고 하였다. 문호를 닫고 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위정척사 계열의 전형적인 내수외양(內修外壤)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개인 문집으로는 『삼원당문집(三元堂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