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대 말에 청계천 광교 부근에 살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 등 기술직 중인(中人)들이 강위를 맹주(盟主)로 하여 맺은 육교시사(六橋詩社)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으며, 사진술에 처음으로 입문하였다. 1883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어 귀국하였고 이듬해 사진관을 설립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1886년에는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강제귀국당하여 원악지(遠惡地)로 유배되었다. 1889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황철의 사진관에서 일하는 한편 1892년 중국의 소주와 항주 등지를 여행하였고 「동파선생입극도(東坡先生笠屐圖)」를 임모(臨模)하여 돌아왔다. 1895년에는 상소문을 올려 재기를 꿈꾸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은둔하여 시와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 시기 호를 설봉(雪峰)에서 백련(白蓮), 이름을 운영(運永)에서 운영(雲英)으로 개명하였다. 1921년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고, 1922년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산인탁족도(山人濯足圖)」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선전의 심사원 차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 불참하였다.
옛 그림들을 임모하면서 기량을 길렀으며, 특히 산수인물을 잘 그렸다. 그의 화풍은 대체로 중국풍이 짙은 북종(北宗) · 원체적(院體的)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독창적인 화풍은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인물과 산수를 적절히 배치하는 구성력은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후적벽부도(後赤壁賦圖)」, 「남극노인수성도(南極老人壽星圖)」, 「동파선생입극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