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야조(冶祖), 호는 어문(魚門)·무명각주(無名閣主). 한성부(漢城府, 지금의 서울) 출생. 자헌대부 규장각 제학윤수(潤秀)의 둘째 아들이다.
1882년 가내에서 운영하는 함경도의 고진동 광산에 사용할 신식 광산 기계를 인수하기 위하여 중국을 여행하였다. 북경을 거쳐 톈진(天津)에 머무를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잡혀온 것을 보게 되었다.
주청덕국광무회사(駐淸德國鑛務會社)로부터 광산 기계를 인수하여 탁송한 뒤 상해(上海)까지 여행하였다. 상해에서는 중국인 좌소인(左紹仁)으로부터 사진 촬영술을 익히고 사진 기계를 구입하여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그해 말에 귀국하였다. 1883년 대안동 사저의 서책 사랑을 개조하여 촬영소를 설치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로 지목된 그의 사진관을 격노한 군중이 난입하여 사진 기재를 파괴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1885년 다시 상해에서 사진 기재를 구입하여 일본의 주요 사진관을 시찰한 뒤 1886년에 귀국하였다. 영선사였던 김윤식(金允植)의 집을 매수하여 사진관을 개설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갑오경장 때까지 개화파로 지목되어 벼슬길이 막혀 사진과 서화에 전념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 및 갑신정변에 연루된 인사들에게 등용의 문이 열리자 1895년 6월포천군수로 첫 관직을 받았다.
포천군수 재직 시에 송금법(松禁法)을 어긴 국왕의 근친에게 장형을 가한 사건이 수구파에 의하여 문제가 되자 사임하였다. 1896년 국왕이 아관파천하고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1906년 사면령이 내려져 의친왕을 모시고 귀국, 농상공부협판에 임명되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경상남도관찰사를 거쳐 종2품 가선대부가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서 주는 관직을 모두 거절하고 일본에 건너가 서화에 전념, 각지를 순력하면서 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사진기를 구입하여 최초로 사진을 도입하였으며, 초상사진뿐만 아니라 중요한 기록 사진을 다수 촬영하여 오늘날 그 시대를 조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남겨 주고 있다.
그의 촬영 범위는 서울의 중요한 요소요소 뿐만 아니라 대궐의 건물까지도 포함되었다. 그 명성이 높아지자 의금부에서는 간첩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킨 일도 있다. 또 궁내의 도화서를 혁파하고 도화서원으로 하여금 사진을 학습시켜 인물을 그리는 대신 사진으로 그 일을 대신하도록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그의 사진 세계는 초상 사진과 기록 사진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 기술이 일천하였던 그 당시로 본다면 가히 한 세계를 이루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고 여겨진다. 또 서화가로서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사진에서 떠난 이후이다.
1913년부터는 일본을 무대로 하여 많은 전람회를 가졌다. 약 10년간 일본 각지를 순력하면서 수십 회의 전람회를 열어 이름이 만인에게 전파되었다.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안진경(顔眞卿), 그림은 거연(巨然)의 화풍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