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카메라를 사용해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표현해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이다. 사진술은 물체의 형상을 정착시켜 반영구적인 상태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화학기술이 발달하는 19세기 초반에 완성되었다.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카메라 기술은 사진의 대중화를 가져왔고, 단순히 실상을 복제·기록하는 차원을 넘어 창조적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880년대에 사진술이 도입된 이후 일제강점기, 광복 후 예술 사진, 매체 사진, 광고 사진 시기를 거쳐 사진을 대량 소비하는 생활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ϓ선, 전자선 등의 작용에 의해서 감광면(感光面) 위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물체의 반영구적인 영상을 양화(陽畫) 또는 음화(陰畫)의 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빛’과 ‘그린다’는 그리스어의 포스(phos)와 그라포스(graphos)의 합성어로 카메라를 사용하여 사물의 빛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카메라를 사용해 사물과 실제의 현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진은 복제와 시각적인 전달 매체를 통하여 사회의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점차 증대되어 가고 있다.
특히 사진 발명의 초기 시대의 복잡한 카메라 메커니즘은 간편하고 쉽게, 그리고 보다 더 빨리 사용해야 한다는 목적을 향해 발전해 왔다. 이와 함께 감광판도 흑백 전용의 시대에서 컬러 시대와 같이 공존하였다. 이러한 사진 산업의 부단한 발전은 사진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독자적인 사진 표현 영역을 구축해 무한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리고 사진의 본질인 기록성과 독특한 표현 세계는 사진만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다른 표현 매체들과 상호 교류를 통하여 그 영역은 확대되어 가고 있다. 또 앞으로 확대되어 갈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포토그라피(Photography), 즉 사진이란 용어는 1839년 영국의 허셀(Herschel, J. W.)이 처음 사용한 이후 세계인의 공통어가 되었다. 사진 발명은 1820년대에 광학과 화학의 결합으로 완성되었으나, 여기까지 도달하는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일이 걸렸다. 사진의 발명과 개발은 오랜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실험, 땀의 결정이었다.
프랑스의 니에프스가 자연 풍경을 최초로 고정한 헬리오그라피를 완성한 것이 1826년, 탈보트가 칼로타입을 발명해, 음화(陰畵), 양화(陽畵) 방식의 길을 연 것은 1840년경이었다. 사진은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제반 구조 속에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게 되고 말았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상을 영원히 정착시키는, 다시 말하면 빛에 민감한 필름 위에 피사체의 순간을 포착해서 잠재적인 상으로 보존하고 복제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사진은 카메라나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영상을 필름에 투영시키고 현상 과정을 거쳐 인화지나 그 외의 방법으로 포지티브 상을 완성했을 때 그 의미가 성립된다.
사진의 발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은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hi)는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그의 비공개된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한 채의 주택이 있고 그 주택의 햇빛이 들지 않는 벽에 조그맣고 둥그런 바람구멍이 있으며, 그 벽 맞은 편으로 양지바른 건물 혹은 광장이나 들판이 보인다면, 햇빛에 비치는 모든 광경은 스스로의 영상을 이 구멍을 통해 들여보내 반대편 벽에 자신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이 흰색이라면 원래대로의 모습이 그곳에 비추어질 것이다. 단 거꾸로 비춰질 것이다. 만약 그 벽에 구멍이 여러 개 있다면 각각의 구멍마다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 또는 암실을 뜻하는 말이다. 어둡게 한 방의 한쪽 면에 구멍을 뚫어 이곳을 통해서 실외의 풍경이 비치도록 해, 투영된 영상을 보거나 그리는 일종의 수상기를 말한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16세기에 들어와 포르타와 바로바르에 의해 급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포르타(Glovanni Battista della Porta)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해, 누구나 쉽게 이것을 이용할 수 있는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연구서인 그의 『자연의 마술Magic Naturalis』(1558년)이란 책은 여러 차례 판을 거듭했다. 그리고 수개 국어로 번역되어 16세기에 출판된 일반 과학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1568년에 『원근법의 실제 La Pratica della Perspettiva』를 저술한 다니엘로 바르바로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바늘구멍 대신 렌즈를 최초로 부착해 사용했다. 그리고 투사되는 빛은 구멍이 작을수록 선명한 영상을 맺는다는 것, 화상의 초점이 선명하게 맺히게 조절하는 방법, 원근감 묘사 등 새로운 기법을 창안했다.
이러한 연구 업적은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종이 위에 비친 영상을 그리고 거기에 그림자를 더하기만 하면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18세기에 와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전도된 영상을 바로 보여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었다. 그리고 들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도 실용화되었다.
휴대용 카메라 옵스쿠라 중에서 특기할 만한 성과는 리플렉스형의 개발이었다. 차안(John Zahn)이 고안한 리플렉스 카메라 옵스쿠라는 오늘날의 싱글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와 같은 원리이다. 젖빛 유리로 된 초점 판에 영상이 투영되었으며, 투명한 종이를 그 위에 올려놓고 그리기만 하면 자연을 묘사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근대 화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이 장치를 크게 이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물체를 이만큼 실물 그대로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알카로티가 지적한 것처럼 카메라 옵스쿠라의 이용은 당시대의 화가들 사이에는 거의 일반화되었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대중화는 투영된 화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사진의 탄생은 여기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실 사진은 광학과 화학을 이용하는 방법에 착안했다면 훨씬 빨리 발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 옵스쿠라의 일방적인 의존은 발명까지 이르는데 아주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되었다.
16세기에 카메라 옵스쿠라 연구가들은 손으로 화상을 그리는데 어떤 물질의 도움으로 기계적 복제가 가능한 방법에 착안하게 되었다. 1614년 안젤로 살라(Angelo Sala)는 질산은이 햇빛을 받으면 잉크 색으로 변한다는, 감광 물질을 발견했다.
1725년 독일의 해부학 교수인 슐체(Johann Heinrich Schulze)는 질산은의 혼합물이 담겨 있는 병에 글자를 배열한 스텐실을 붙여 햇빛에 노출시킨 결과, 노출된 부분은 검게 변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슐체는 검게 변화되는 것은 질산칼륨이 아니라 용해된 은입자라는 것도 증명했다. 그리고 산화마그네슘, 타 버린 탄산 암모늄과 비슷한 물질들이 사진술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공적을 들어 독일에서는 은염류를 기본으로 하는 사진술의 발명은 슐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영국의 토마스 웨지우드(Thomas Wedgwood)는 종이를 질산은 용액에 담갔다가 카메라 옵스쿠라에 장전해 햇빛에 노출하면 투영된 영상을 고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험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1799년 웨지우드는 질산은에 담근 종이나 가죽을 카메라 옵스쿠라에 장전해 영상을 고정시키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영구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은 표백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찾지 못해 성공 바로 직전에 막히고 말았다.
토마스 웨지우드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1834년부터 카메라 루시다를 사용해 화학 재료를 사용해 자연을 묘사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은염류에 담가 감광성을 지닌 종이 위에 나무 잎사귀나 새의 깃털 그리고 레이스 같은 것들을 올려놓고 광소묘 작업도 했다. 1835년에는 쥐덫이라고 별명이 붙은 조그만 카메라로 장시간의 노출로 촬영한 다음 이것을 식염수로 정착해 불변의 영상을 얻는데 성공했다.
카메라 옵스쿠라에 투영된 영상을 감광판에 포착해, 현상 과정을 통해 평면상에 가시적인 상을 최초로 완성한 사람은 프랑스의 요셉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ephore Niepce)였다. 니에프스의 발명은 유태의 비투먼(bituman, 역청)이라는 천연 아스팔트를 디펠유에 섞어 도포한 퓨터판을 카메라 옵스쿠라에 장전해 촬영한 다음 라벤더유로 씻어내면 햇빛을 받은 부분은 굳어지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씻어내려, 햇빛을 받은 부분이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니에프스는 1826년 파리의 슈발리에로부터 구입한 카메라 옵스쿠라로 살롱-쉬르-손 지방의 생 루드 바랜에 있는 그의 자택 르 그라의 2층 작업장 창문에서 8시간의 오랜 노출 끝에, “자연을 재현한 인류 최초의 성공적 역작” 관점(Points De Vue)이 탄생하게 되었다.
니에프스는 자신이 관점이라고 불렀던 그의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파리의 화가이자 디오라마 연구가이고 사진술 연구에 열심이던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rre)의 제안으로 공동 연구를 모색하면서 사진술의 대중화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1829년 12월 4일, 니에프스와 다게르는 사진술의 실용화를 위해 10년간의 동업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짧은 노광으로 사진을 만들 수 있는 방법과 이 결과물을 실용화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던 니에프스는 1833년 살롱-쉬르-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다게르는 혼자서 니에프스의 선행 연구를 근간으로 은도금 동판과 요오드로 실험을 계속해, 1837년 은판 사진술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다게르의 은판 사진, 즉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은 동판을 은도금한 후 이를 거울처럼 윤이 나게 연마하고 깨끗이 닦은 후 옥소가 담긴 상자 위에 은판 면이 접촉하도록 놓아 감광시켰다. 옥소와 은의 증기가 빛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옥화은 막을 형성시켜 감광판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감광판을 카메라 옵스쿠라에 넣어 촬영했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투영된 빛의 강약에 따라 옥화은을 은으로 변화시키면서 형성된 잠상(潛像)은 가열한 수은이 들어 있는 상자 위에서 양화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진한 소금물에 담가 정착하고 물에 씻어 건조했다. 더 이상 빛에 변화되지 않는 감광판은 광택을 내기 위해 잘 닦은 후 액자에 넣어 보존했다.
다게레오타입은 프랑스 천문대장이자 하원 의원인 아라고(Fran○ois Arago)의 주선으로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였다.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학사원에서 열린 과학 아카데미와 미술 아카데미 합동 회의석상에서 다게레오타입의 매입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다게르에 의해 발명의 세부 사항이 공개되었다. 다게르는 『다게레오타입과 디오라마 제조술에 관한 역사 및 해설』을 발행하고 그의 매형인 알퐁스 지루(Alphonse Giroux)와 함께 다레오타입 카메라와 관련 장비를 제작하는 등 상업화에 힘썼다.
다게레오타입은 선풍적인 인기 속에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들이 줄을 이었다. 영국의 탈보트는 다게레오타입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음화 상태로 감광판에 영상을 포착해 여기에서 양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나의 음화에서 수많은 양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오늘의 사진 개념은 탈보트로부터 시작되었다.
다게레오타입은 여러 가지 결점을 보완해 1840년경에는 노광 시간을 1분 이내로 단축했다. 다게레오타입은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과 미국 등 미지의 세계를 향한 풍경 사진 촬영에 도전했다. 파리와 런던 그리고 미국의 중요 도시에서도 초상 사진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다게레오타입 스튜디오가 개설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칼로타입은 처음부터 특허권을 설정해 사용권을 제약했으며 사진 자체도 선명한 화상을 얻을 수 없어 다게레오타입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칼로타입의 사진사적 업적은 특허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루어졌다.
칼로타입 스튜디오를 경영하는 힐(David Octavius Hill)과 아담슨(Robert Adamson)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 분열을 기념하는 초상화 제작의 밑그림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인물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가까운 어촌을 찾아 풍경과 어부들의 생활상도 촬영했다. 이들 사진은 정확한 직관력과 우수한 조형 감각이 거칠어 보이는 칼로타입의 특징과 어울려 대상 인물의 특징을 잘 나타냈다.
1851년 영국의 아처(Frederick Scott Archer)가 콜로디온 습판법을 발명할 때까지 심각한 경쟁 상대 없이 함께 성공을 누렸으나 콜로디온 습판법의 실용화는 사진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다게레오타입이나 칼로타입은 퇴보하고 콜로디온 습판법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카메라는 주름 상자가 부착되고 부피가 줄어지고 짧은 노광 시간 때문에 셔터가 사용되어 휴대에 편리하고 빠른 속도로 촬영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었다.
그러나 콜로디온 습판 사진의 결점은 즉석에서 유리판에 콜로디온을 도포해 질산은 용액에 담가 감광성을 지니면 카메라에 장전해 찍은 다음 곧 바로 현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조해지면 감광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야외 촬영에는 필수적으로 휴대용 암실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콜로디온 습판법은 2∼20초 밖에 걸리지 않은 경이적인 감광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1장의 원판에서 여러 장의 양화를 만들 수 있었다.
사진의 대중화는 시작되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풍물의 기록 작업이 인기를 끌었으며 풍경 사진, 건축물 사진도 주목을 받았다. 이 시대의 역사적인 기록도 콜로디온 습판법으로 촬영되었다. 1855년 360여 장의 크리미아 전쟁 기록은 영국의 로저 펜톤(Roger Fenton)이 암실 마차를 전쟁터에 끌고 다니면서 콜로디온 습판으로 촬영한 것이다.
매튜 브레디(Mathew R. Brady)와 가드너(Alexander Gardner), 오설리반(Timothy H. O'Sullivan) 등은 남북 전쟁에 뛰어들어 미국 역사의 귀중한 순간을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콜로디온 습판법은 후에 발명된 리차드 매독스(Richard L. Maddox)의 건판 사진술에 의해 초상 사진의 세계를 활짝 열어 나갔다.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é Adolphe Eugéne Disdéri)는 명함판 사진(carte de visite)을 고안해 냈다. 그래서 그의 사진관은 사진을 찍으려는 고객들로 연일 줄을 설 정도로 파리가 떠들썩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 건너가서도 그 인기는 시들어지지 않았다.
초상 사진의 열기 속에서 초상 사진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일단의 초상 사진가들, 나다르(Nadar,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뚜르나숑)을 비롯한 일단의 파리 사진가들과 영국의 여류 사진가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 등이다. 나다르는 당시대의 저명한 예술인들을 단순한 배경 앞에서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게 해 대상 인물의 모습을 솔직하고 리얼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표출했다.
영국의 카메론 부인은 유명 인사들을 얼굴만을 클로즈업하거나, 아웃 포커스로 처리해, 피사체에 대해 내면의 어떤 것을 기록해 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고급 예술로서 통용되는 속성을 사진으로 보여 주려고 했다.
19세기 후반에 대두된 레일란더(Oscar Gustave Rejlander)와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으로 대표되는 회화의 기법을 모방한 사진, 이드웨어드 머이브리즈(Eadweard Muybridge)와 에티엔느 쥘 마레이(Etienne Jules Marey) 등의 인간과 동물의 동작을 사진으로 기록한 성과,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이 회화주의적 합성 사진에 반대해 자연을 주제로 삼을 것을 제한한 자연주의 사진, 그 외에 인상주의 사진, 회화의 테마를 모방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 등이 등장해 근대 사진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1867년 영국에서 개발된 건판과 1880년대 코닥의 등장은 사진의 대중화 그리고 사진술을 가족 단위로 만들었다. 100장의 롤 필름이 장전된 휴대하기 편리한 카메라를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여 셔터만 누르면 현상과 인화를 해 주는 편리한 방법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1886년 사진의 예술적 접근에 대하여 최초로 예술로서의 사진을 제기한 것은 영국의 에머슨이었다.
그러나 사진을 독자적인 예술로서,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을 확립한 것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s)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사진 전람회나 여러 가지 사진 활동을 통해서 사진에는 개인의 예술적 감정과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클라렌스 H. 화이트(Clarence H. White), 거트루드 캐세비어 (Gertrud K○sebier), 알빈 랭던 코번(Albin Langdon Coburn)과 같은 젊은 사진가들의 활동에서 용기를 얻었다.
사진가와 사진 예술에 대한 도움을 준 또 한 사람은 베레나이스 아보트(Bernice Abbott)이었다. 유명 인사의 초상 사진, 건물과 거리의 풍경 등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업적은 프랑스의 으제느 앗제(Eugéne Atget)의 작품 발굴이었다. 앗제의 사진들은 대예술가의 작품으로서, 설득력 있고 솔직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진을 추구하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이 사진만의 독특한 세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노력하던 초기에 『스튜디오 원』이라는 출판물은 전 지면을 사진 특집으로 제작한 획기적인 기획을 하였다. 1905년 여름 특별 판으로 간행된 이 잡지에는 스티글리츠, 화이트, 스타이켄, 다이크, 코번 등 많은 사진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사진을 전 지면에 할애한 『스튜디오 원』의 기획은 사진을 독자적인 표현 예술로서 정립하고 이러한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투쟁하던 때에 만들어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진 예술에 공헌한 사진가들 대부분은 화가 또는 예술가들이었다. 스타이켄은 화가였고 만 레이는 사진 측량법을 소개한 예술가였으며 아보트는 조각가, 모호리 나지는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다. 애덤즈나 커닝험, 웨스턴 등은 예술적인 훈련을 쌓았거나 예술가들과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진가들이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사진계는 예술 사진에 심취해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 사진이나 개척 시대의 사진 정신을 이어 받은 기록 사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자콥 A. 리스(Jacob A. Riis)나 루이스 하인(Lewis W. Hine) 등은 빈민들의 생활상이나 외국 이민들, 노동 현장 등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매체를 통해 보도해 법을 제정하거나 행정 명령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이를 활용했다.
미국의 역사적, 사실적 그리고 현실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은 리스나 하인 등의 전통을 이어 경제 공항으로 피폐된 농촌 실상을 기록한 농업안전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의 사진 활동에서 꽃피우게 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 불어닥친 사상 최대의 경제 공항을 타개하기 위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입안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농업안전관리국을 설치하고 자료부를 두어 농촌의 실상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농촌의 피폐 현상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은 자료적인 사실을 통하여 정책을 입안한다는 측면과 현장 사진 기록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최선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농업안전국의 다큐멘트는 테마의 근저에 흐르는 문제성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의 집단적인 사진 활동은 사진에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전설적인 작업이 되었다.
제1,2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란, 6 · 25 전쟁, 베트남 전쟁은 전쟁을 중심으로 한 전쟁 보도 사진가들의 활약을 눈부시게 하였다. 과거의 전쟁 사진들이 전적지나 전선에서 전개되는 전투나 피쳐(feature) 형식의 사진 방법이었다면 이들 전쟁 사진은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에 희생된 병사나 민중 그리고 생활 참상에 초점을 맞춘 휴먼 다큐멘터리였다. 전쟁 사진은 충격적이고도 리얼한 현장감으로 전쟁의 무익함과 인간 존엄성이 주장되었다. 그리고 『라이프』 등과 같은 그래픽 저널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진 저널리즘이 정립되었다.
1924년 독일의 오스카 바르나크(Oscar Barnack)에 의해 개발된 35㎜ 필름 사용 라이카 카메라의 출현은 사진 미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휴대하기 편리하고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롤 필름을 사용하고, 견고하고 밝은 렌즈를 갖춘 라이카는 모든 사진가들이 애용하는 카메라가 되었다. 특히 결정적 순간이라는, 표준 렌즈가 부착된 라이카를 사용하는 데서 얻어진 것으로 사진계에 미친 영향도 대단하였다.
까르띠에 브레숑(Henry Cartier Bresson)은 모든 요소들이 파인더의 시야에 동시에 모이는 순간을 포착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은 사진계뿐만이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 사진을 전시하는 화랑에까지 두루 영향이 미쳤다. 심지어 그 유명한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도 부레숑의 사진을 전시한 적이 있는데, 이 박물관으로서는 최초로 전시된 사진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취미나 직업으로 사진에 관여된 사람은 수천 수억을 헤아리게 되었다.
사진은 시각적인 언어로, 창조적인 예술로 깊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1955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기획 전시하였던 인간 가족전의 감동은 사진의 독자적인 표현 예술로서의 역량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게 하였다. 이반 드미트리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기획하였던 ‘회화에 있어서의 사진’ 전람회도 또 하나의 이정표를 기록하였다.
사진이 창조적인 시각 예술로 발전되고 인식의 폭이 넓어진 배경에는 카메라 메커니즘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으며 이 분야는 상대적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무중력 상태의 달에 도달한 우주 비행사들이 촬영한 우주 시대의 사진들은 시각 통신 수단에 또 하나의 역사적 장을 더하여 주었다. 생생한 달 표면을 볼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카메라 장비와 전송 시스템은 사진 영역을 더 넓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시각 정보로, 예술로, 기록으로서의 쓰임새는 그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어 가고 있다.
사진이란 명칭은 도입 이전부터 사용했다. 사진 발명을 이룩해 낸 유럽에서는 이 명칭을 빛으로 그린다는 포토그라피(Photography)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실물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사(寫)적인 측면과 내면의 정신도 나타내야 한다는 진(眞)의 측면을 강조한 동양 회화 정신의 전신(傳神) 철학이 담겨 있는 사진(寫眞)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진은 이러한 명칭과 함께 개화 문물로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카메라와 함께 사진술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39년 사진의 발명보다 40여 년이 뒤진 1880년에 와서야 그 실현을 보게 되었다. 다게르의 『다게레오타입의 역사와 설명』이라는 해설서는 불과 5개월 동안에 29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전파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은 유럽이나 미주 쪽과는 달리 전래의 동시대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문화 영향권에서 단절된 지역적인 특성도 있었지만 국가마다의 서구 문물에 대한 수용상의 제약도 중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서구 문물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네덜란드 상선과 아편 전쟁으로 인하여 1840년대에 사진술을 수용해 초상 사진 시대가 일찍이 개화되었다.
사진의 전래나 도입은 사진기를 도입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사진을 완성하는 전 과정을 수용했을 때 전래의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사진 역사는 1880년대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고 1880년 이전에는 사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던가 하면 외국인들이 우리를 기록한 사진 행위도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1860년경에는 동지사은사로 중국에 갔던 이의익(李宜翼)과 수행원들이 베이징의 러시아인 사진관을 찾아 초상 사진을 촬영한 적도 있다. 이들이 사진을 처음 찍어 본 한국인들임과 동시에 사진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들이다. 그 후에도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 중에는 사진을 찍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또 사진을 간직하고 들어와 주위의 친지들에게 이것을 소개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미국과 일본의 사진사들이 강화도에 상륙해 신미양요의 전투 장면, 강화도조약 당시의 현장을 촬영한 적도 있었다.
사진 도입에 관련된 자료는 극히 미미해서 논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기록은 「한성순보」 1884년 2월 14일자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이다. 이 신문에 의하면, “지난 여름 저동에 살고 있는 우후를 지낸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슈노스케를 초빙해서 촬영국을 설치했으며 금년 봄에는 마동에 사는 외무아문 주사를 지낸 지운영 또한 촬영국을 설립했는데 일본에 가서 진술을 배워 왔으며 그 기술이 정교하다.”고 두 사람의 사진관 개업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이 신문의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김용원은 1883년 여름에, 지운영은 1884년 봄에 촬영국을 개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또 다른 기록에는 김용원이 경상남도 수영의 우후로 재직할 때인 1880년 4월경에 부산의 일본 관리관을 찾아 사진술과 분석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해 9월에는 부산포의 일본인 거류지에 개업하고 있던 사진사에게 여러 번 찾아다니면서 사진술을 배웠다고 한다.
1880년 이후에는 김용원에 뒤이어 지운영과 함께 황철도 사진술 연구에 열성적이었다. 이들은 사진 도입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선각자이다. 황철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김용원이나 지운영과는 달리 일본에서가 아니라 중국에 건너가 상해(上海)에서 사진술을 습득했으며 사진 문화의 서구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황철이 사진술 습득을 끝내고 사진 기재를 구입해 귀국한 것은 1882년 말경, 양력으로 계산하면 1883년 2월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종로의 대안동, 소안동 그리고 충무로 등지에서 사진관을 개업, 비교적 많은 사진을 남기는 등 활발한 사진 활동을 하였다. 이 땅에 사진 정착을 위해 힘을 다한 사진가 중의 하나였다. 이들 사진 도입의 선각자들, 김용원, 지운영, 황철 등은 사진관을 설립해 초상 사진을 촬영하는 방법으로 민중 초상 사진 시대를 개막했다.
사진 도입의 선각자 중에 지운영도 한국 사진 역사의 초창기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통해 큰 업적을 남겼다. 1882년 겨울, 그는 사진술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고배의 헤이무라 사진관에서 그의 말대로 교묘한 빛의 기술인 사진술을 습득했다.
귀국해서는 종로 3가 부근에 촬영국을 설치했다. 여기서 말하는 촬영국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사진관과 같은 명칭이다. 지운영은 그의 사진술을 공식화하기 위해 당시의 국왕이었던 고종의 어진, 다시 말하면 초상 사진 촬영을 시도, 1884년 3월 16일, 고종을 알현하고 어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의 얼굴을 주로 촬영했던 초상사진은 바로 사진도입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으며 사진 풀러스 초상 사진이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이 분야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기 초상 사진들은 여러 계층의 사진들을 상대로 한 촬영 활동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사진 기자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사진 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보다는 특권층이나 부유층의 독점물로 오랜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 도입되어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이나 사회적인 저항으로 시련과 좌절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수구 세력들이 사진관을 파괴하고 사진을 찍는 행위 그 자체까지도 금지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샤머니즘의 서구 문물 거부는 많은 속설을 만들어 일반 민중들이 사진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불행을 예고했다.
사진 기계가 나무에 비추면 나무가 말라죽고 집이나 담에 비추면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다던가 풀에 비추면 말라죽는다는 등 죽음을 불러온다는 위협적인 경고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셋이서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한다던가 부부가 같이 촬영하면 이별한다고 해서 사진을 멀리 하도록 여러 가지 경고를 만들어 냈다.
사진과 샤머니즘과의 충돌이 빈번해지자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외국 세력의 유언비어가 활개를 쳤다.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뜨거운 솥에 삶아서 사진 약을 만들어 사용한다던가 어린아이의 눈을 빼내 사진 박는 기계에 눈을 해 박는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서양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적도 있었다. 이것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사진을 유언비어에 실어 자국 세력의 이익을 위해 퍼뜨린 낭설이다.
1895년부터 실시한 단발령은 사진의 정착 그리고 초상 사진에는 새로운 발전적 전기가 되었다. 당시의 국왕인 고종이 솔선해서 상투를 자르고 정부의 대신들도 단발을 하고 일반인들에게도 단발령을 실시되었다. 단발령은 강제로 실시되었으며 유교적인 사회 질서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경향 각지에서 순검을 동원해 강제 삭발을 실시하자 이에 대한 저항이 점차 커지고 급기야는 저항 세력이 결집되어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의 봉기로까지 파급되었다. 단발을 강제로 당한 사대부들은 부모나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소극적이지만 외출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단발을 피하기도 했다.
상투를 자르도록 했던 단발령은 여러 가지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초상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초상화보다 값싸고 빠른 그리고 정확하게 재현되는 사진을 선택해 자기의 모습을 남기려는 초상 사진에 대한 열망이 커지게 되었다.
단발령 사건은 자기의 모습의 변화와 연관된 것이었으며 유교적 사고에서 보면 조상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러한 절실한 문제에 직면해서 초상 사진의 역할이 커지게 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변화 이전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하는 보존 의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초상 사진에 대한 욕구는 초상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관의 등장을 가속화시켰으며 사진사라는 새로운 직종이 탄생하게 되었다.
1900년대 초에는 초상 사진을 촬영하려는 고객이 사진 도입 이후 가장 많았던 시기로 김규진의 천연당 사진관의 경우만 해도 수백 명이 이곳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끊이지 않는 고객들의 쇄도, 이러한 현상들은 사진관의 제도를 정착시키게 했으며, 서울을 비롯해 지방까지 사진관이 세워져 초상 사진의 대중화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진관 제도와 사진사 중심의 사진 활동은 사진 문화의 모든 것이 이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진관 제도의 정착으로 기술의 경쟁은 심해졌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사진은 점차 대중화되어 갔다. 그리고 사진 기술의 보급이 가능한 여러 가지 제도들도 만들어졌다. 와이엠씨에이(YMCA)에 사진과가 개설되고 몇몇 학원에서도 야간에 사진을 가르치는 야간 속성 사진술 강습원들이 개원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사진 교육의 출발이었다.
이 시기는 우리의 사진 활동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890년부터 일본인들이 카메라를 메고 한반도에 건너와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에까지 사진관을 세워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사진 문화가 스스럼없이 이 땅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풍부한 자본으로 대형 사진관을 설립하고 고급 기술을 바탕으로 영업하여 사진계를 장악해 나갔다. 사진의 침략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심화의 정도는 점차 커져 나갔다.
이러한 1920년대에 일본인들 주도의 사진계에 한국적인 사진 문화를 정립할 것을 선언하는 모임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1926년에 창립한 경성사진사협회이다. 여기에서 한국 사단이라는 사진의 정신적 지반이 형성되고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사진 활동이 이뤄지게 되었다. 이 협회의 구성원은 김광배 · 신낙균 · 박필호 · 민충식 · 박민달 · 신칠현 · 이재창 등으로 이들에 의해 다양한 사진 활동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경성사진사협회는 또 예술 사진을 맨 처음 도입하고 사진의 표현 가능성을 예술 사진에서 찾았던 단체였다. 예술 사진은 소재나 촬영 등의 표현 방법보다 인화 방법으로 표출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고무 인화법, 브롬오일, 카본티슈 등의 인화 방법으로 스트레이트한 영상을 회화적인 분위기로 전환시켰다. 인화된 사진은 고상하고 우아한 맛을 풍겼으며 선예한 영상에 싫증을 느낀 사진가들이 연초점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예술 사진의 또 다른 방법은 특수한 인화법의 이용이 아니라 친근감 있는 소재를 아름답게 표출하는 표현 방법에서 찾았다. 풍경을 주로 하는 새로운 사진 사조는 잠시 선예한 영상을 존중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화면의 구성을 그림처럼 아름답고 고상하게 시각적으로는 완벽한 구도주의를 추구했다.
최초의 예술 사진 전람회는 1928년에 개최되었다. 정해창에 의해 처음 마련된 예술 사진 전람회는 동아, 조선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을 예술 사진이라고 인식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정해창이 전시한 40여 점의 사진은 인물과 정물도 있었지만 풍경 사진이 더 많았다.
예술 사진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과 함께 이들의 사진에 접목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은 1930년대에 본격화되고 이로써 다양한 사진을 추구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 배경에는 카메라 메커니즘의 발달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휴대에 편리한 소형 카메라의 보급, 감량도가 향상된 건판과 필름, 값싼 카메라의 수입 등과 함께 이를 이용하는데 전문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피사체나 표현에 있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표현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재로는 이러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항상 예술 사진이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사진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표현이 아니라 형상 공모전에 입상하는데 있었다.
많은 사진 공모전이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부추겼다. 신문과 잡지, 사진 재료상까지도 이러한 행사를 주관했다. 사진의 가치 기준은 바로 사진 공모전의 입상에 따라 좌우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성장은 이들의 단체 구성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만들었다.
1937년을 전후하여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 단체는 70여 개 이상이었으며 회원 수도 1천여 명에 달했다. 서울과 부산, 평양, 대구는 물론 사리원, 강경 등 읍 소재지까지도 아마추어 사진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서울의 경성아마추어 구락부, 백양사우회, 인상사진연구회, 사구회, 평양의 오월회, 대구아마추어 구락부 등은 당시대의 사단에서 주목을 끌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 말기는 사진 활동의 암흑기였다. 일제는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행정 처분, 요새지대법, 군기밀 보호법, 치안 유지법 등의 법령으로 사진 표현과 활동의 자유를 규제하고 탄압했다. 전시회나 단체의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었다.
요새지대법에 의해 사진 촬영 행위도 규제 대상이 되었다. 50미터 높이의 건물이나 산 등 높은 곳에서 부감으로 촬영한다거나 요새지나 바닷가의 촬영은 철저하게 금지했다. 필름과 인화지 등 사진 재료는 배급제를 실시했으며 사진가들에게는 선전 선동적인 사진 제작이 강요되었다. 이러한 극심한 탄압과 규제 속에서 허용된 것은 민속이나 토속적인 소재였다. 이러한 풍물 사진의 권장은 현실에 대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민족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편협한 사진 활동, 일본을 위한, 일본의 지배하에서 사진을 해왔던 친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가 주체된 사진 환경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사진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사단을 재편성하고 여러 가지 사진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진계는 과거의 사진 활동에 대한 반성이라든가 청산을 통해 일제 잔재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방이라는 역사의 전환이 이루어 졌음에도 사진의 방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일제 강점기의 사진을 리바이벌하는 것처럼 과거 일인들과 함께 해 왔던 사진적 경험이 기준이 되고 평가의 척도가 되었다. 여기에 창작 활동의 절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진 재료의 품귀 현상이라는 일제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도 물려받게 되었다.
해방 공간의 어려운 상황에서 사진인들은 새로 사진 단체를 결성하고 여러 사진 행사도 기획했다. 1945년 9월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창립된 데 이어 서울인상사진연구회 · 서울사진가협회 · 전국사진가연합회 등이 서울에서, 평양사진가협회 · 경북사진문화연맹 · 부산예술사진연구회 · 전남사진연구회 등이 지방 사진 단체로 조직되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는 1945년에 이어 1946년에도 회원 작품전을 열었으며, 전국에 사진을 공모하는 제1회 예술사진전람회를 주최했다. 또 자유신문사도 해방 기념 전국사진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이 두 사진 행사가 해방 이후 모든 사진인들의 관심 속에 열린 전국 규모의 공모전이었다.
해방 이후 사진인들의 관심사는 예술 사진이었다. 예술 사진이라고 해서 어떠한 미학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마추어 사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이 예술 사진은 사진인들을 만족시킬 만한 이름이었으나 무엇이 예술 사진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술 사진인지 이에 대한 과제나 대책은 전무했다.
해방 이후 사진계가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이유 중에는 명목뿐인 예술 개념에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하에서 민족 사진을 굳건하게 지킨 사진가들이 없었다는 점도 그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었다.
1948년 해방 이후 최초로 열린 임석제의 개인 사진전은 여러 가지 화제를 남겼다. 한 평론가는 이 전시회에 대해, “일제가 남기고 간 사진 예술의 애매한 정의를 용감히 부정하고 참된 민족 예술 정신에 입각한 사진 예술의 장르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작가적 양심의 각성” 또는 “과거의 태도 즉 섬세하고 감각적인 낭만적 분위기를 탈각하여 강직하고 현실적인 리얼리즘에 살려고 투쟁하는 고민과 의지가 보이는 작품”이라고 다소 선언적인 내용의 평이지만 리얼리즘 사진을 거론한 것은 처음이었다.
임석제의 사진에는 광산 노동자, 부두 노동자들, 생활의 근저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소재로 한 점과 이러한 소재를 작가의 내면 세계에서 여과한 사실적인 사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면은 거칠고 미화되지 못한 생소한 표현이었지만 인간의 삶을 언어적인 메시지 속에 포함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사진 활동은 다큐멘트 방법으로 시대의 사건 현장을 보고하려는 방법의 출현이었다. 해방의 감격적인 순간의 기록에 이어 이경모의 여순 사건 현장의 다큐멘트는 이 사건이 남긴 이념 분쟁의 참혹하고 처절한 상황을 위험을 무릅쓰고 극명하게 포착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첫 페이지가 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6 · 25 전쟁은 사진계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전쟁 발발 이후 국방부 정훈국은 사진대를 조직 현역 군인을 정점으로 일반 사진가들이 참가, 전쟁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했다. 초기에는 수명에 불과했던 종군 사진대는 점차 많은 사진가들이 참가했다. 종군 사진가들은 전투 현장에서 피해 가지 않는 총탄 사이로 비정한 전쟁을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 · 25 전쟁의 체험이 남긴 또 하나의 변화는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이었다. 1952년 피난지 부산 국제구락부 화랑에서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회원전을 개최한 회원들은 그들의 사진 속에 완결하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사진에 대한 반성과 새롭게 리얼리즘 사진 표현을 다같이 표방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의 자각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 파장은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피난지 부산의 사진 활동에서 또 하나의 기록적인 사실은 해외 사진전에의 진출이었다. 1952년부터 시작된 국제 사진전 진출은 초기에는 출품의 열의와는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는 50여 개국에서 4천여 점의 작품이 입선되는 등 한국사진의 국제 진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주의 사진 운동과 국제 사진전 진출은 사진의 새로운 가치관 정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외국 사진 사조를 유입하고 국제 사진전에 진출 등으로 해서 1950년 후반에서 60년대의 사진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특히 그 영향이 컸던 사진전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이 개관 기념으로 기획한 인간 가족전의 국내 순회 전시로 불확실한 우리의 사진 미학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1957년 4월 1일부터 25일까지 경복궁 미술관에서 개최된 순회전은 무려 30여 만 명의 관람객이 입장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 6 · 25 전쟁의 쓰라린 아픔, 부산 피난지의 사진 활동 등에서 촉발된 의식은 인간 가족전과 사진 저널리즘의 영향으로 새로운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1956년에 등장한 신선회는 이듬해 회원 작품 38점과 공동 테마로 창작한 시장의 생태를 촬영한 사진도 함께 전시했다. 비평가들은 시대정신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회화적인 표현 방법을 초월한 깊은 내용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신선회 회원들의 관심은 인간 생활이었다. 즉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공통된 관심사였다. 현실을 직시하고 생활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삶과 생활을 통해 메시지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들이 표방한 사진의 내용이었다.
1950년대를 지나 1960년 초기는 매체 사진의 역할이 유감 없이 발휘해 된 시기였다. 특히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매체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실의 확증과 부정의 현장을 포착한 수많은 사진이 매체에 반영되었다. 사건의 현장에서 목격자로서 사진 기자들은 불의에 대한 고발과 직설적인 카메라워크를 인쇄 매체에 의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의 목격자로서 충실하게 현장을 지켰다.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과 경무대 앞의 시위대 발포 등 현장 기록은 생사를 초월한 사진기자 정신이 성취한 특종 사진으로 혁명을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이 되었다. 4 · 19 혁명의 전 과정은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으며 사진 기자들은 정권 붕괴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매체 사진은 4 · 19 혁명을 통해 그 역할과 임무가 무엇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발견했다. 현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그리고 보도 사진가의 시각은 진실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모전의 공과는 여러 측면에서 판단될 수 있으나 이러한 경향은 사진 활동의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공모전 중심의 사진 활동에서 얻어진 인습은 오히려 창작 활동을 단순화시키고 과거의 예술 사진이 남겼던 파행적인 유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1960년 이후의 사단은 공모전 중심의 사진 활동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사단은 6 · 25 전쟁 이후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한 리얼리즘 사진과 예술 사진으로 알려진 기존의 살롱 픽처를 선호하는 작가들로 양분으로 시작된다. 이들 사이에는 경쟁과 비난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편을 가르는 것처럼 사진인들은 이를 중심으로 해쳐 모이게 되었다. 국전의 사진 부문과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양극화 현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사진 부문이 참가하게 되고 1963년 12월에는 첫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 작품전이 열렸다. 그리고 국제적인 사진 행사인 동아국제사진살롱도 개최되는 등 많은 공모전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들 공모전의 성격에 따라 사진의 경향도 좌우되었다. 국전이 회화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면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생활과 인간의 리얼한 표현과 내용에 바탕을 두었다. 작가들은 이러한 상반된 경향에 좌우되어 동일한 작가가 서로 다른 공모전에 이름을 날리는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새롭게 광고 사진이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는 농업 중심에서 공장생산 구조로, 그리고 인구의 이동과 소비의 패턴도 바뀌게 되었다. 대량 생산의 대량 소비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게 되었으며, 소비를 촉진하는 선전과 광고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광고 사진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대가 만들어 낸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총아였다.
사진은 취미라든가 예술로서 이해하던 시대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광고 사진 분야가 정착되고 광고 사진가들의 역할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1977년에는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광고 사진계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광고 사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충무로에 50여 개의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많은 광고 사진가들이 활동의 무대를 넓혀 나갔다.
산업화 시대와 함께 밀려온 사진 환경의 변화는 흑백과 컬러 사진이 공용되기 시작해 나중에는 컬러 필름이 흑백을 대신해 사진 의식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특히 산업 시대에 등장한 광고 사진과 패션 사진 분야는 컬러 사진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컬러 필름과 함께 오토 포커스 구조를 갖춘 소형 카메라의 대량 보급은 폭발적인 사진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사진의 생활화, 대중화라는 사진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일반 모두의 표현 도구가 되면서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활동과 규모가 점점 확대되고 이들이 사진을 주도해 나가는 세력으로 커지게 되었다.
이 시대에 와서 중요 사진 수용 계층으로 등장한 것은 가족 단위의 소비 계층이었다. 1960년대부터 카메라의 대중 보급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 단위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었다. 또한 산업 사회가 심화되면서 여행과 여가를 즐기는 일들이 동시성을 가지고 어울러지면서 스스로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기념 사진이 사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진 인구의 증가는 사진 제작 시스템을 변화시켰으며 사진의 소비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