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당사진관은 1907년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개설한 사진관이다. 당대의 유명 서화가인 김규진(1868∼1933)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의 석정동(지금의 중구 소공동)의 자신의 집에 사진관을 개업했다. 김규진은 초상사진, 졸업사진, 일반인들의 기념사진·기록사진·결혼식 사진·장례식 사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진이 이용되도록 사진을 보급하였다. 신문 광고를 하고, 여성사진사를 통해 여성의 사진관 이용을 유도하고, 교육생을 모집하여 사진을 가르치는 등 다양한 영업방식을 이용하여 사진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천연당사진관은 당대의 유명 서화가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1907년 8월 서울의 석정동(石井洞: 지금의 중구 소공동)의 자신의 집 행랑 뜰에 개업한 사진관이다.
1907년 7월 27일 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보면, 김규진은 사진관을 개업하기 전에도 어진(御眞)을 수차례 촬영하였으며, 평양에 사는 박주진(朴冑鎭)과 함께 개업을 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부인인 향원당(香園堂) 김진애(金眞愛, 본명 김성녀(金姓女), 1868∼1949)가 여성들의 사진촬영을 전담하는 부인사진사로 활동하여 여성들도 사진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천연당사진관은 1908년 음력 정월 무렵 한 달 동안 1천여 명이 이용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사진관을 이용하는 고객이 증가하자 김규진은 일본에서 신식 기계를 수입하고 취소은사진(臭素銀寫眞), 백금사진(白金寫眞), 오색사진(五色寫眞: 채색사진, 인화된 사진 위에 유화용 물감, 데생용 콩테, 수채화물감, 에어브러쉬 등을 사용하여 실물의 색채를 나타내는 사진) 등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사진의 고급화를 주도하였다. 또 교육생을 모집하여 무료로 사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진관 이용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외상으로 거래된 사진대금의 체납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양자 김영선(金永善)이 평양에 가서 천연당사진관의 분관인 기성사진관(箕城寫眞館)을 개설하였다. 1913년 12월에는 천연당사진관 내에 각종 서화를 진열하고 판매하는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부설하여 함께 운영하였다.
1915년에는 이층 양옥을 신축하고 사진관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이때 날씨와 관계없이 촬영할 수 있는 천장식과 인공조명을 사용할 수 있는 복사창식 사진관 구조를 갖추고 사진 기자재도 또 한 차례 교체하였다. 신축건물은 아래층 50평, 위층 50평의 건평 100평 건물로 아래층은 사진관과 고금서화관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1915년 설립된 해강(海岡)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의 교육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천연당사진관은 규모가 계속 확장되었으나, 김규진이 점차 사진관보다는 고금서화관의 운영에 초점을 맞추면서 어느 때인가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천연당사진관은 신문을 통해 적극적으로 광고를 하고, 여성사진사를 통해 여성의 사진관 이용을 유도하고, 교육생을 모집하여 사진을 가르치는 등 다양한 영업방식을 이용하여 사진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김규진은 초상사진, 각 학교의 졸업사진, 일반인들의 기념사진 · 기록사진 · 결혼식 사진 · 장례식 사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진이 이용되도록 사진을 보급하였다.
또 신축 사진관에 제대로 된 촬영장을 갖추어 실내 사진촬영의 정석을 마련한 점, 취소은사진 · 백금사진 · 오색설채사진 등 사진과 서화를 접목시킨 다양한 미술사진을 개발한 점에서 사진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