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유학을 간 김규진은 북경, 양주, 상해지역을 돌아다니며 오창석(吳昌碩), 서신주(徐新周), 오대징(吳大澂), 민영익(閔泳翊) 등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고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연구하였다. 1894년에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朝鮮國平壤城圖)」(1895년)를 그렸다.
1896년에는 궁내부(宮內府) 외사과(外事課)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이후 내장원 주사, 예식원 주사 및 문서과장, 제도국 참서관, 시종원 시종(侍從), 경리원 기사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영친왕의 서법(書法)을 지도하는 서사(書師)에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1913년천연당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병설하였다. 자신의 서화 작품과 다른 여러 명가(名家)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古書畵)도 취급하였다.
김규진이 1915년에 발족한 ‘서화연구회’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으로서 3년의 수업과정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타계한 안중식의 뒤를 이어 조석진이 회장이 되자 서화협회를 탈퇴하였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서예와 사군자부의 심사 위원이 되었다.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의기(意氣)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篆) · 예(隷) · 해(楷) · 행(行) · 초(草)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다.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그림으로는 글씨에서의 필력이 그대로 반영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 등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 「금강산만물초승경(金剛山萬物肖勝景)」과 「총석정절경(叢石亭絶景)」(1920년) 같은 본격적인 채색화도 그렸으며, 산수화 · 화조 등 여러 화제를 두루 다루었다.
또한 영친왕의 서사(書師)를 맡으며 서화교본으로 제작한 『김규진 화첩』을 비롯하여, 서화연구회에서의 서화교육을 위한 교재로서 『서법진결(書法眞訣)』(1915), 『육체필론(六體筆論)』(1915),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1916) 등을 만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