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창덕궁의 편전(便殿)은 본래 선정전이었는데,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성종(成宗)이 이미 26년 동안 휴식의 장소로 사용하던 숭문당(崇文堂)을 1496년(연산군 2)에 희정당(熙政堂)이라고 당호를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세웠다. 18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이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도도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조 때 재건될 때에는 15칸에 지나지 않았으나 뒤에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늘어나 현재의 큰 건물이 되었다.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 · 선정전의 동쪽에, 외전건물들과는 축을 약간 달리하여 놓여 있으며, 희정당의 북쪽에는 내전의 정당인 대조전이 있다. 건물 앞의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는 등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장대석을 5단 쌓은 기단 위에 모난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외진주(外陣柱 : 바깥기둥) 위에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태의 2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칸에는 운공(雲工 :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두어 주심도리를 받게 하였다.
익공의 내부는 보아지가 되어 퇴량을 받게 하고, 퇴량의 내부는 고주에 결구되었다. 고주 상부는 팔각(八角)인 주두를 놓고 그 위에 사각(四角)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았으며, 대들보 상부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지붕은 각 마루를 양성하고 용두 · 잡상을 두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툇간으로 하여 통로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정면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응접실로 하고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이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 · <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