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연구회 ()

회화
단체
1915년에 개설한 근대기의 서화교육 기관.
정의
1915년에 개설한 근대기의 서화교육 기관.
개설

근대의 서화가 김규진(金圭鎭)이 1915년에 소공동 고금서화진열관 내에 개설한 서화교육기관이다. 서화연구 풍조가 유행하던 분위기 속에서 김규진의 개인화숙 체제로 운영되었다.

연원 및 변천

서화연구회는 회장에 김윤식을 두고, 부회장에 조중응, 고문에 고미야 사보마츠(小宮三保松) 이왕직 차관, 총무에 나카무라(中村)를 앉혔다. 취지서에 의하면 서화는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고 문명은 국력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서화가 발전하는 것이 곧 국력의 발전이라고 했다. 서화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거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화를 이용하는 것이 많으니 이를 연구하고 허술하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않고 회원으로 지도했고, 이력서를 첨부한 신청서를 받았으며 회비(금 1원을 매삭 25일 내로 각출), 만 3년의 수업기한이 있었다. 명망가의 찬조를 받았으며, 회원들의 품행이 정직하고 일반 사회의 사표됨을 요하는 회칙을 두었다. 여자 회원도 받았던 점이 특징이다. 1917년 무렵에는 동문 수학했던 노원상을 부강사로 두어 1년간 서화교육을 담당하도록 했다. 1911년에 개설한 경성서화미술원(1912년 이후 서화미술회로 운영)과 쌍벽을 이루는 교육기관이 되었다.

지방에서 서화연구회의 휘호회와 전람회를 열어 대중적 호응도 불러 일으켰으며, 안중식(1919년)과 조석진(1920년)의 사후에 폐회된 서화미술회와 달리 1920년에 민병석을 회장으로, 이완용, 이하영, 박기양, 조동윤,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를 고문, 부교수로 윤기선, 이병직을 추천하는 등 규모가 오히려 확대되었다.

서화연구회는 1930년까지는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 해에 김규진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위축되기 시작했고 더욱이 조선미술전람회의 서 및 사군자부의 폐지론이 거론되면서 타격을 받았다. 1931년에 서화연구회는 김규진의 자택인 수송동으로 옮겨지며 규모도 축소되었고, 결국 1933년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기능과 역할

1918년 6월에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이 때 남녀 19명이 졸업했으며, 그 중 이병직(李秉直), 김진우(金振宇)가 가장 이름이 높다. 이응로도 이 화실을 다녔고, 여성 화가인 방무길(方戊吉)도 이곳 출신이었는데 1926년까지도 서화연구회는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던 듯하다. 이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오귀숙(吳貴淑), 박창래(朴昌來) 같은 여성 화가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즈음부터 김규진은 ‘해강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혹평을 받았고, 1927년까지 서 및 사군자부의 심사위원을 계속했으나 1928년부터 제외되었다.

김규진은 서화교육을 위해 『서법진결(書法眞訣)』(1915년), 『육체필론(六體筆論)』(1915년),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1916년)을 집필했을 정도로 열정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해강 김규진(1868∼1933)의 회화 연구」(서재원,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집필자
강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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