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Netherlands)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유럽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입헌군주국.
이칭
이칭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 Holland), 화란(和蘭)
정의
유럽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입헌군주국.
개관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이며, 일명 Holland·화란(和蘭)이라고도 한다. 서쪽과 북쪽이 북해와 접하며, 해안선은 약 451㎞에 달한다. 속령으로 카리브해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5개 섬으로 구성)와 아루마 섬이 있으며, 한때 인도네시아도 300년간 식민지로 있었으나 1950년 독립하였다.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Hague, 네덜란드어 Dan Haag)이며, 행정구역은 12개 주(provincie)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4만 1543㎢, 인구는 1694만 7904명(2015년 현재)이다. 주요 인종은 게르만족 계통의 네덜란드족이다. 공식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이 통용된다. 종교는 가톨릭교회가 32%, 네덜란드 개신교가 17%이며, 특히 왕실의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이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간척사업과 농지개량사업이 활발하고, 국토의 70%가 농목지로서 낙농과 원예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 현 EC)의 창립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화를 추진하여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했으며, 주로 석유화학·금속·철강·수송·조선·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2016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7625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827달러이다.

정부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에 의회 내의 의석 분포에 따른 비율로 배분하는 것이 원칙이며, 총리는 형식상 국왕이 임명한다. 의회는 임기 6년의 상원(75석) 및 임기 4년의 하원(150석) 양원으로 구성되며, 주요 정당으로는 노동당(PVDA), 기독민주당(CDA), 자유민주당(VVD), 민주66당(Democrats66), 녹색당, 사회당 등이 있다.

약사

서기전 1세기 중엽 로마의 시저(Caesar, J.)가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현재의 네덜란드 영토를 점거했으며, 그 뒤 400년경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따라 로마인은 물러가고, 남부에는 프랑크족,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하였다. 6세기에는 대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경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수개의 공국(公國)이 생겨났다.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家)의 필립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였고, 1515년부터는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그 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개신교를 탄압하자, 오렌지가 윌리엄공의 지휘하에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1581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17세기경 해양 및 식민지 경영국가로서 국세가 융성하여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현재 뉴욕의 전신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기도 했다. 1795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패망시까지 점령당했으며, 1814년 윌리엄 1세의 통치하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의 통일왕국이 건설되었다.

1831년 벨기에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는 윌리엄 2세의 자유헌법 제정과 50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으로 근대 산업국가로 등장하였다.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독립했으며, 제1·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정책을 택했으나, 독일군에 침략당하여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마샬(Marshall)의 원조에 힘입어 전후 복구했으며, 이후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하였으며, 1945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전쟁 중인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EC, 현 EU)에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1990년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는 유고 내전과 아프리카의 내전, 기근 등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 들어와 반외국인 감정이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은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증폭되었고, 2002년 마침내 네덜란드 사회를 뒤흔드는 폭풍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2002년 의회에서 통과된 난민 추방 중단 결의안은 난민에 대한 대규모 사면과 영주권 부여의 길을 터놓은 셈이며, 정부의 강경 정책에 의회가 제동을 건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1948년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율리아나(Julianace)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율리아나 여왕은 1980년 4월 현 베아트릭스(Beatrix) 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왕은 상징적 존재로서 모든 국사에 형식적·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며, 법령 또는 중용 국정관계 문서에 대한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副署)가 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하므로 국왕은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관계를 맺은 것은 조선시대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J., 박연, 朴淵)가 표류, 귀화했던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돌아간 하멜(Hamel, H.)은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하멜표류기』를 쓰기도 하였다. 1907년 이준(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다가 분사(焚死)한 바 있다. 그의 유해는 1963년 서울로 이장되었으며, 유해가 있던 곳에 1977년 10월 묘비가 제막되었다.

네덜란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7개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적극 활동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 온 주요 우방국이다. 6·25전쟁 참전국으로 강원도 횡성군에는 화란 참전용사비가 있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1961년 4월 4일 국교 수립에 합의하였다. 1968년 12월 주한 상주공관이 개설되고, 1969년 10월에는 네덜란드 주재 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양국은 1966년 4월에 특허 및 상표 협정, 1970년 4월에 사증 면제 협정, 1970년 6월에 항공 협정, 1974년 10월에 투자보장 협정, 1978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79년 2월에 전대차관 협정, 1982년 12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5년 12월에 해운 협정, 2002년 7월에 사회보장 협정, 2003년 7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7년 7월에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40억 24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제트유 및 등유·무선전화기·승용차 등이며, 수입액은 43억 49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제조용장비·반도체제조용장비부품·나프타·고철 등이다.

양국은 경제협력을 보다 원활히 하고 강화하기 위해 1975년 한·화 공동위원회, 1976년 한·화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어 상호협의를 해 오고 있으며, 2007년 현재 경제단체로 KOTRA를 비롯하여 삼성전자·LG전자·한국타이어·외환은행 등 40여 개 상사들이 진출해 있다.

또한, 한·화란친선협회 및 화란한국전참전용사회·한국전참전화란해군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1976년 10월 우리나라의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719명의 교민 및 1,032명의 체류자가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에는 271명의 네덜란드 선수단이 참가한 바 있으며, 2002년에 개최된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에 진출시켜 전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에 수교하였으나 교민이나 체류자는 없다.

북한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2014년 현재 672만 달러로 주종목은 기계공구류와 비금속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수입액은 267만 달러로 기계류와 섬유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양측은 2001년 4월 무역 및 경제 협력에 관한 회담록, 북한지역 통과 가스 파이프라인 설치 양해각서 등을 교환하였다.

네덜란드 안의 한국 문화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문화사적 관계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의 루브루크(Rubruck, W. van)은 프란치스코회 신부로서 그 첫 번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왕 루이 9세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1253∼1255년 사이에 몽고제국의 영내를 다녀오고 우리나라를 까울레(Caule, 高麗)라 하여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까울레는 고려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에 따라 폴로(Polo, M.)도 카울레를 언급하였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뒤 그 견문을 직접 책으로 소개한 사람은 하멜(Hamel, Hendrik)이다. 하멜은 네덜란드 배 데스페르베르호(DeSperwer號)가 1653년 제주도 해안에서 파선되자 표류하던 선원들과 제주도에 올라와 동료 7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3년간 살다 돌아갔다. 그 뒤 그는 『하멜표류기』를 1668년 로테르담에서 출간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곧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번역되었다. 편집과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들어가기는 했으나, 이 책은 한국인과 문화를 처음으로 17세기 유럽인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다.

비첸(Witsen, N.)이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북부 및 동부 타타르인(Noord en Oost Tartaryen)』도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다. 특히 1705년에 나온 그 재판본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관한 유럽인들의 기록과 하멜의 두 동료에게 받은 제보를 바탕으로 한글 어휘와 한국에 관한 값진 정보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독일인 지볼트(Siebold, K. T. E. von)가 이 방면에 큰 몫을 해냈다. 그는 의사로서 네덜란드를 위해 1823∼1829년 동안 일본의 데지마(出島:나가사키)에 머물면서 학교를 세워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그는 표류해서 그곳에 와 있던 한국인들을 여러 차례 면담하였고, 그에 앞서 한글의 자모(字母)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네덜란드 왕립학술원에 보낸 바 있다.

네덜란드에 돌아간 뒤 그는 1831년 『일본기(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라이덴에서 독일어로 써 냈는데, 그 책의 다섯 장에는 우리나라의 관료제도·역사·문화·언어 등이 다루어져 있다. 이 자료집 편집에 조수로서 특히 한국관계 부분을 주로 담당한 호프만(Hoffmann, J. J.)은 뒷날 라이덴대학교의 첫 일본어학 교수가 되거니와, 여러 가지의 일본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단군으로부터 1637년까지의 한국사 개관, 일본의 대 한국 및 중국 관계 등을 서술하였다.

그 밖에 1920년 『하멜표류기』를 학문적으로 다룬 회틴크(Hoetink ,B.)와 1931∼1946년 에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교수로서 비교언어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어·중세어 및 현대어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라데르(Rahder, J.)는 네덜란드에서의 한국학 성립을 위해 기여한 바 크다.

네덜란드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한국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외교관·상인 등에 의해 수집되었고,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곁들여 구입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들 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소장하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 라이덴 소재 국립민족학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가장 두드러진다.

국립민족학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대략 1,500점에 달하는데, 세 사람의 소장품이 그 근간을 이룬다. 중국 베이징 주재 네덜란드 공사관의 서기관이자 통역관이었던 라인(Rhein, J.)이 그 중 한 사람으로, 36폭의 한국 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889년 네덜란드 정부에 보냈다. 그 가운데 23점은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이고, 나머지 13폭은 석천(石泉)의 것이었다. 그것이 뒤에 이 박물관에 들어왔다. 다음은 지볼트의 수집품이다.

또 한 사람은 한말 전환국(典圜局)의 기사로 우리나라에서 근무한 크라우스(Kraus)의 수집품인데, 대한제국 당상관의 복식과 화폐를 포함하여 조선 말의 값진 유물이 상당수 거기에 들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의 한국 유물은 50점 남짓하다. 그것은 대부분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베스텐도르프(Westendorf)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을 재구입한 것들로,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을 비롯하여 청자와 관음탱화·칠기 등 진귀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의 해양사박물관도 몇 폭의 풍속도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같은 도시의 알란트피어손(Alland Pierson) 박물관 등에 소수의 한국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막쿱의 데파그도자기 박물관, 로테르담의 지역 및 민족학박물관, 아르덴부르그의게멘텔리크 박물관 등이 약간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 개설한 사람은 포스(Vos, F.)이다. 그는 1946년 라이덴대학교의 일본어학과 강사로 시작하여 1947∼1948년 학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어 및 한국역사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1958년 일본어 및 한국어학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어학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1961년에는 같은 대학교에 한국학 석사과정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고, 그 8년 뒤인 1969년 일본학 및 한국학센터로 학과 명칭을 바꾸었다. 그 동안 이 학과에서는 여러 명의 한국학 전공학자가 배출되었다. 헨토른(Henthorn, W. E.)은 1966년 「한국:몽고의 침공 Korea:The Mongol Invasio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발라벤(Walraven, B. C. A.)은 1985년에 「무가(巫歌)와 한국고전문학(Shaman Songs and Korean Literatur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스는 서유럽 최초의 한국학 교수로서, 유럽 다른 나라의 한국학 전공 박사 및 교수 자격시험의 공동 시험관으로 활약하다가 1983년 정년퇴임하였다. 이후 발라벤이 전임으로서 한국어·한국문학입문·한국문화 등의 강좌를 개설하고 올로프(Olof, A. M.)와 라머스 신(Lamer-hin, S.)이 한국어를 가르쳤다. 전공 학생이 5명, 부전공학생이 해마다 10명 정도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학 가운데에서 고전문학과 사상사 방면의 연구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 묄렌호프(Moelenhoff)에서 1976년 이래 동양문고의 이름으로 동양고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내고 있는바, 거기에 한국 고전 관계의 것이 둘 포함된다. 즉, 1978년 포스에 의해 번역, 출판된 『둥근 사랑, 모난 사랑(Liefe road, liefe vierkant)』이라는 제목의 한국 시조선과 1980년 발라벤이 「홍길동전」·「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가」를 번역하여 펴낸 『활빈인活貧人(De redder der armen)』이 그것이다. 또 암스테르담의 열대연구소 지역연구 시리즈로서 판 덴 보른(Van den Boorn)이 쓴 『남한(Zuid-Korea)』도 특기할 만한 저서이다.

이 밖에 네덜란드·한국협회가 정기적 모임을 갖고 한국학 전공의 국내외 학자와 외교관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연구의 일환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한국 연구의 배경과 노력에 부응하여 1980년 4월에는 유럽한국학회의 제4차 학술대회가 라이덴대학교에서 개최된 바 있다.

한편,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의 자매 결연 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시립박물관 전시를 시작으로 80여일간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

참고문헌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네덜란드 개황』(외교통상부, 2006)
『네덜란드』(산업연구원 편, 선진국국별편람, 1986)
Korean Genre Paintings in the Netherlands and around the World(Walraven, B. C. A., Korea Journal Vol.23, No.1, 1983)
「Korean Studies in the Netherlands-Past and Present」(Vos, F., 『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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