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완의 호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맹주인 장지완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장혼(張混)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중인 출신의 문인들인 장효무(張孝懋)·임유(林瑜)·고진원(高晋遠)·유기(柳기)·박사유(朴士有)·한백첨(韓伯瞻) 등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비연시사(斐然詩社)라고 하여 19세기 여항문학을 이끌었다. 서원시사(西園詩社)보다 약간 후기에 결성된 듯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죽림칠현에 비의(比擬)하고 오직 시문에만 뜻을 두고 날마다 경치좋은 자연 속에 노닐며, 사대부 중심의 사회체제 내에서 불우한 자신들의 처지를 시로 읊었다.
특히, 장지완은 율과(律科)출신의 중인으로서 김정희(金正喜)의 성령론(性靈論)을 이어받아 시에서 개성을 중시하는 시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밖에 역관 출신의 정수동(鄭壽銅)·현기(玄錡) 두 사람이 이 시사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들은 역관의 가문에 태어났으나 거기에 종사하기보다는 뛰어난 재주와 기이한 행동으로 세상을 희롱하며 일생을 마친 불우한 인물들이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중심인물이었던 장혼(張混)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이 시사는 당대 위항인(委巷人)들이 처한 사회적 처지에 대한 자각을 더욱 분명히 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한말의 사회적 변화에 대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