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7년(숙종 33)에 별시 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설서 · 지평 ·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713년(숙종 39) 강원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부정을 일삼은 지방관들을 탄핵하였다. 관동 지방이 800여 리에 달하는 해안을 끼고 있으나 진영(鎭營)은 매우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서 군보(軍堡)를 단속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였다.
경종 대에 들어서도 수찬 · 헌납 · 부응교 · 집의 등에 임명되었고, 1724년(경종 4)에는 동래부사로 나아갔다. 이때 경종이 승하하였기 때문에 하직 인사는 새로 즉위한 영조에게 올렸다.
영조 즉위 직후 노론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다가, 1727년(영조 3)에 정미환국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승지, 대사간 등에 임명되고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강원도의 방비를 굳건히 할 필요성에 따라 교체되었다. 8월에는 대사간으로 임명된 직후 상소하여 이인좌의 난에 동조한 역적들을 확실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사성 · 대사헌 · 공조참판 · 경기도 관찰사 등을 거쳐 1753년(영조 29)에는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소론 완론 계열에 속하여 전반적으로 큰 정치적 부침이 없이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기로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