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덕이(德而), 호는 지와(止窩). 조희보(趙希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형(趙珩)이고, 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며, 어머니는 홍명일(洪命一)의 딸이다.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의 사위이고, 당색은 소론이다.
진사과를 거쳐 1687년(숙종 13) 3월 삼일절제(三日節製)에서 수석해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가 이 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4년(숙종 20)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고, 이어 사서(司書)가 되어서는 평일에도 서연(書筵)을 열도록 제창하였다.
부수찬으로 옮겼다가 현감 김광우(金光宇)의 고신(告身: 관직 임명장)에 대한 서경(署經) 잘못으로 삭직(削職)되기도 했으나 곧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으로 옮긴 뒤 대사헌 최석정(崔錫鼎) 등과 함께 장희재(張希載)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96년 교리·보덕(輔德)·부교리(副校理)·겸필선(兼弼善)·보덕(輔德)·부수찬(副修撰)·겸사서(兼司書)·사간(司諫)·부교리(副校理)·응교(應敎)를 거쳐, 이듬 해 수찬(修撰)으로 임명되고, 늙은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자청해 홍천(洪川) 수령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그 고을이 잔폐(殘廢)하다는 것을 듣고 관직 교체를 청해 홍문관 관원에 제수되자 물의를 빚었다.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집의·수찬을 거쳐 사간으로 재직 중 남해현령(南海縣令) 이상휘(李祥輝)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았다. 그 뒤 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수찬을 두루 거쳤다.
1699년(숙종 25) 부교리(副校理) 때 사사로이 역(驛)에 소속된 말을 사용했다는 탄핵을 받았고, 이듬해 시관(試官)으로 일할 당시 과옥(科獄)에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었다. 사후 1814년(순조 14)에 효자로 정려(旌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