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승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공조좌랑, 영평현령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언휘(彦暉)
성재(誠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9년(인조 27)
사망 연도
1698년(숙종 24)
본관
여흥(驪興)
주요 관직
영릉참봉|공조좌랑|영평현령
내용 요약

민이승은 조선 후기 공조좌랑, 영평현령 등을 지낸 문신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학문에 매진하여 윤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설에 뛰어나 낙론 계열을 이끌었 김창협과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 등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논쟁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공조좌랑, 영평현령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이다. 성종의 부마 민자방(閔子芳)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민만(閔晩)이다. 어머니 압해정씨(押海丁氏)는 참봉 정언찬(丁彦瓚)의 딸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주요활동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과거 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대장부의 사업이 여기에 있지 않다며 그만두고는 육경(六經)과 오서(五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후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는데, 윤증으로부터 실심(實心)과 실공(實工)이 뛰어나다는 극찬을 받았다.

1682년(숙종 8) 천거로 관직에 올라 창릉‧영릉‧효릉 등의 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곧 그만두었다. 이어 1688년 종부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분개하며 상소하였는데, 그 말이 장엄하고 정직하여 보는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갑술환국 이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696년(숙종 22) 영평현령에 제수되어 진휼에 공을 세웠다. 이어 세자의 보필을 맡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기 어려울 정도로 집안이 가난하여, 국왕 숙종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려주었다.

학문과 저술

성리설에 정통하였으며, 낙론 계열을 이끌었던 김창협(金昌協)과의 지각(知覺) 논쟁을 통해 학술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鄭齊斗)와도 양지(良知)와 지각에 관해 논쟁하였다. 『주역(周易)』, 『춘추(春秋)』, 삼경(三經), 사서(四書), 그리고 예학에 관한 저술을 십수 편 남겼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원전

『귀록집(歸鹿集)』
『농암집(農巖集)』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논문

김윤경, 「閔以升 智性論의 轉變」(『양명학』 29, 한국양명학회, 2011)
임홍태, 「閔以升 사상을 통해 본 조선후기 智와 知覺의 同異論爭」(『한국철학논집』 23, 한국철학사연구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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