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가와 외가 모두 공신을 배출한 가문의 후손으로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1663년(현종 3) 진천현감, 1668년 은율현감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종묘령을 거쳐 안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의 국상 당시 차사원으로서 배의 곁꾼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 봉심 행차를 더디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삭직되었였다.
이후 서용되어 숙종 즉위 후인 1678년(숙종 4) 충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1682년에는 영천군수로 나아갔으며, 1701년에는 광흥창수에 임명되었다. 이어 1702년(숙종 28) 부호군, 부사용 등의 군직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관직 생활 외의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 호보(號譜)』의 기록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나서 명나라 정제독(程提督)이 그를 불러 보고는 크게 칭찬하여, 부인이 수를 놓은 세건(帨巾) 두 폭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또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당시 동생 유명웅(柳命雄)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박태보(朴泰輔)가 주도하여 소청을 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명륜록(明倫錄)』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