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영천군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도(有道)
사재(思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진주(晉州)
주요 저서
명륜록(明倫錄)
주요 관직
영천군수|첨지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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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유명재는 조선 후기 영천군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2대에 걸쳐 공신 반열에 오른 집안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났으며 문음으로 출사하여 주로 지방관에 머물렀다. 말년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 『명륜록(明倫錄)』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정의
조선 후기 영천군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유도(有道), 호는 사재(思齋)이다. 임진왜란 당시 인조를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때도 인조를 호종하다가 세상을 떠난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증손이다. 아버지 유구(柳䪷)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진천군(晉川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 진무공신에도 책록되었다. 어머니는 정사공신 능성군 구굉(具宏)의 딸이다.

주요 활동

친가와 외가 모두 공신을 배출한 가문의 후손으로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1663년(현종 3) 진천현감, 1668년 은율현감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종묘령을 거쳐 안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의 국상 당시 차사원으로서 배의 곁꾼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 봉심 행차를 더디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삭직되었였다.

이후 서용되어 숙종 즉위 후인 1678년(숙종 4) 충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1682년에는 영천군수로 나아갔으며, 1701년에는 광흥창수에 임명되었다. 이어 1702년(숙종 28) 부호군, 부사용 등의 군직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관직 생활 외의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 호보(號譜)』의 기록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나서 명나라 정제독(程提督)이 그를 불러 보고는 크게 칭찬하여, 부인이 수를 놓은 세건(帨巾) 두 폭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또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당시 동생 유명웅(柳命雄)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박태보(朴泰輔)가 주도하여 소청을 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명륜록(明倫錄)』을 남겼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원전

『동현호록(東賢號錄)』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호보(號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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