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 유하(柳下). 아버지는 무관이었던 익하(翊夏)이며 어머니는 강릉 유씨(江陵劉氏)이다.
홍세태는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고 7, 8세에는 글을 지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나 신분이 중인층이라 제약이 많았다. 시로 이름이 나서 김창협(金昌協) · 김창흡(金昌翕) · 이규명(李奎明) 등의 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냈다. 임준원(林俊元) · 최승태(崔承太) · 유찬홍(庾纘弘) · 김충렬(金忠烈) · 김부현(金富賢) · 최대립(崔大立) 등의 중인들과 시회를 함께 하며 교류하였다.
홍세태는 1675년(숙종 1) 을묘식년시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다. 1682년 통신사 윤지완(尹趾完)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698년에 역과 합격 때에 제수된 이문학관에 실제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의 시를 보고자 하였을 때에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임금에게 호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 해에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1702년에 복직하였다.
홍세태는 1705년에 둔전장(屯田長), 1710년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 1713년 서부주부 겸 찬수랑(西部主簿兼纂修郎)이 되었다. 1715년 제술관이 되었다. 1716년에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다. 그러나 곧 파직되었다. 뒤에 그가 재능과 맞지 않게 궁핍하게 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광좌(李光佐)의 도움으로 1719년에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이 되었다. 1722년(경종 2)에는 제술관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남양감목관이 되었다. 문장의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제술관을 특히 많이 역임하였다.
홍세태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8남 2녀의 자녀가 모두 앞서 죽어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이러한 궁핍과 불행은 그의 시풍에도 영향을 끼쳐 암울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중인 신분으로서의 좌절과 사회부조리에 대한 갈등이 시 속에 우수와 감분(感憤)을 담게 하였다. 한시에 대한 재능을 널리 인정을 받았다. 비절(悲切)하고 그윽한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특히 능하였다.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발달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중인층의 문학을 옹호하는 천기론(天機論)을 전개하였다. 위항인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위항시선집을 간행하였다. 죽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시문집을 엮어 자서(自序)를 써서 부인에게 맡겼다. 1730년(영조 6)에 사위 조창회(趙昌會)와 그의 문인에 의하여 『유하집』 14권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