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한필 ()

한문학
인물
조선시대 『구봉집』에 실린 시32수와 잡저 등을 저술한 학자. 문장가.
이칭
계응(季鷹)
운곡(雲谷)
인물/전통 인물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여산(礪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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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구봉집』에 실린 시32수와 잡저 등을 저술한 학자. 문장가.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계응(季鷹), 호는 운곡(雲谷).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송인(宋璘)이고, 아버지는 판관 송사련(宋祀連)이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송사련의 4남1녀 중 막내아들로, 송익필(宋翼弼)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송한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안당(安瑭)의 서매(庶妹)인 송감정(宋甘丁)의 아들이었으므로 법의 규정대로 얼손(孽孫)에 해당되어 신분상의 제약을 크게 받다가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아 형 송익필(宋翼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다.

그의 형 송익필은 이이(李珥)를 시종 옹호하였는데, 소장사류들은 이이가 동서분쟁에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신진사류를 옹호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송익필을 심의겸(沈義謙)의 당(黨)으로 지칭하고, 이이에 대한 함원(含怨)을 동인(東人)들이 송익필에게 전가하여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로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형 송익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다.

그리하여 일족이 유리분산되는 비극을 당하였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 길이 없지만, 그는 형 송익필과 함께 선조 때의 성리학자·문장가로 이름이 있었다. 이이는 성리(性理)의 학을 토론할 만한 사람은 익필형제뿐이라고 하였다.

박인로(朴仁老)·김지백(金知白)·최대겸(崔大謙)·박신립(朴信立)·조호인(曺好仁)·박준민(朴俊民)·김상문(金尙文)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인 『운곡집(雲谷集)』은 시 32수와 잡저·제문·서(書) 등을 수록하고 있는데, 형 송익필의 『구봉집(龜峯集)』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수록된 시는 많지 않지만 그 가운데 담겨 있는 사상과 표현기법은 뛰어나다. 「우음(偶吟)」으로도 알려진 시 「석춘(惜春)」은 봄비에 핀 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봄철의 무상함을 오언절구로 노래한 것이다.

참고문헌

『호보조선평민문학사』(구자균, 문조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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