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의 변 ()

조선시대사
사건
1675년(숙종 1) 3월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禎)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 궁녀들과 간통하였다고 고발된 일로 남인과 서인의 당쟁을 격화시킨 사건.
정의
1675년(숙종 1) 3월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禎)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 궁녀들과 간통하였다고 고발된 일로 남인과 서인의 당쟁을 격화시킨 사건.
개설

1675년(숙종 1)에 숙종의 외조부였던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이 궁녀들[홍수(紅袖)]과 간통하였다고 고발하였다. 남인들은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와 가까웠으므로 그들을 구명하고자 하였고, 서인들은 남인들을 비판하여 당쟁이 격화되었다.

역사적 배경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은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楠)과 함께 흔히 ‘삼복(三福)’으로 불리었다. 그들은 효종과 현종의 사랑을 받아 어려서부터 궁궐에서 자라다시피 하였으므로, 장성한 후에도 궁궐을 무상출입하였고 행실이 오만하고 방탕하였다. 그들의 외조부는 남인 오단(吳端)이었으므로, 1674년(현종 15) 제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허적(許積) 등과 결탁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1674년 8월, 현종의 국상이 일어나자 복창군과 복평군은 상례 일로 궁중에서 유숙하는 일이 많았다.

경과

1675년(숙종 1) 3월 12일에 숙종의 외조부였던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지시를 받고 종실 이정과 이연이 궁녀들과 간통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조선시대 궁녀와 간통한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하였기 때문에, 남인들은 김우명이 근거 없이 왕손들을 해치려한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명성왕후가 어전 회의에 나와 그들이 궁녀 상업(常業)·귀례(貴禮)와 간통한 사실을 증언하였다. 이에 이정과 이연 및 궁녀들은 사형을 감하여 멀리 유배되었다. 그러나 남인 윤휴(尹鑴)와 홍우원(洪宇遠) 등은 대비가 조정에 간여하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임금이 잘 보살피도록[조관(照管)] 건의하였다. 그러자 서인 김수항(金壽恒)은 남인들이 대비를 견제하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였고, 남인들은 그를 탄핵하여 영암으로 유배시켰다. 그해 7월에 큰 가뭄이 들자,죄수들을 석방하면서 이정과 이연도 석방되었다.

결과

이정과 이연의 궁녀 간통은 명성왕후가 증언하였으므로 사실로 인정되어 유배의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몇 달 후 석방되었고, 9월에 서용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복평군 이연과 복선군 이남은 역모죄로 처형되었고, 윤휴와 홍우원도 대비 모욕죄로 사사(賜死)되거나 유배되었다.

의의와 평가

1675년(숙종 1)의 ‘홍수의 변’에서 명성왕후가 궁녀들의 간통을 고발하게 하고 증언하여 왕손들을 처벌하게 한 일은 조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남인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서인들은 남인들의 대비에 대한 불경을 공격하여 당쟁이 더욱 격화되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당의통략(黨議通略)』
『조선정치사』(이희환, 혜안, 2015)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이영춘, 집문당, 1998)
『조선후기당쟁연구』(이희환, 국학자료원, 1995)
「숙종초기의 정치구조와 「환국」」(홍순민,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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