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였다.
외교사항을 집대성한『동문휘고(同文彙考)』에 의하면 진주사의 임무는 중국으로부터의 책문(責問) 또는 중국측의 오해에 대한 해명, 특히 중국의 사서(史書)에 조선에 관한 기사가 잘못 소개된 기록 등에 대한 정정요구나 조선내의 반역사건에 대한 전말보고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절단의 편성 및 인원은 사행의 종류에 따라 달랐는데, 진주사는 보통 사은행(謝恩行)에 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은사와 동일하였다. 이 경우 사신은 정사·부사·서장관(書狀官) 등 34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반 수행원을 합치면 모두 200∼300인이 되었다.
명대(明代)에는 해로와 육로가 모두 이용되었으나, 청대(淸代)에는 주로 육로만을 이용하였다. 육로의 중요한 지점을 열거하면 평양·의주·압록강·봉황성·연산관(連山關)·요동(遼東)·심양(瀋陽)·광녕(廣寧)·사하(沙河)·산해관(山海關)·통주(通州)·북경(北京)으로 총 3,100여리에 약 40일의 여정이나 북경에서의 체류기간을 합치면 보통 5개월 내외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주문(奏文)의 양식은 조선국왕성모근(朝鮮國王姓某謹), 주위모사운운연계운운(奏爲某事云云緣係云云), 사리위차근구(事理爲此謹具), 주문복후칙지(奏聞伏候勅旨), 연호·월·일(年號月日) 등의 격식으로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