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철 ()

북관지
북관지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선전관, 충청도수군절도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계명(季明)
지족당(知足堂)
시호
장무(莊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4년(인조 12)
사망 연도
1701년(숙종 27)
본관
평산(平山)
주요 관직
선전관|충청도수군절도사|병조참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후기 선전관, 충청도수군절도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계명(季明), 호는 지족당(知足堂).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경진(申景禛)이며, 아버지는 도정(都正) 신준(申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효종 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가 효종이 북벌(北伐)을 위하여 훈척(勳戚: 국가에 공훈이 있는 자들의 친척)의 자제들에게 무예를 닦게 하자, 유생을 이끌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현종 초기에 선전관을 지낸 뒤 무과에 급제하였다. 1669년(현종 10)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1년 통제사,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75년(숙종 1) 병조참판을 거쳐 1680년 경신대출척 때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서인편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공조판서를 거쳐 1688년 형조판서로 훈련대장을 겸하고, 1694년 갑술옥사 때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장희재(張希載) 등을 처벌하였다.

1695년 형조판서, 1700년 호조판서, 이듬해 다시 훈련대장이 되고 공조판서를 지냈다.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에 병권의 요직을 거치면서 서인편에 서서 큰 정치적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청선고(淸選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