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수백(壽伯). 아버지는 남두명(南斗明)이다.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727에 청주영장(淸州營將)이 되어 토포사를 겸하였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던 중, 청주성이 함락되면서 절도사 이봉상(李鳳祥)과 함께 붙잡혔으나, 반도들에게 굴하지 않고 꾸짖다가 죽었다.
조정에서는 충절을 가상히 여겨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등용하였고, 부인이 죽자 장례물품을 지급하여 치상하였다. 1728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듬해에 숭선군(崇善君)에 추봉되었으며, 청주의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가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