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도 우역제도(郵驛制度)가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역전의 명목 또한 있었을 법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 역전은 각 지방 공해전(公廨田)의 일종으로 983년(성종 2) 이래 지급되었다. 각 역(驛) 운용 경비의 재원인 공수전(公須田)은 대로역(大路驛)에 60결(結), 중로역(中路驛)에 40결, 소로역(小路驛)에 20결씩 배정되었다. 사무용품비의 재원인 지전(紙田)은 대‧중‧소로역에 각각 5결‧2결‧2결씩, 역리(驛吏)로 충원되는 역장(驛長)에게는 장전(長田)을 대‧중로역에만 각기 2결씩 지급되었다. 고려시대의 역전은 대체로 공유지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각 도의 역을 대‧중‧소로로 나누고 각 역에 역전을 지급하여 운용 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역전의 규모는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시행에 따라 다소 축소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으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① 역의 공수전은 대로역 각 20결(황해도 대로역에는 25결씩, 함경 · 평안도의 대로역에는 10결씩 추가로 지급), 중로역 각 15결(함경‧평안도의 중로역에는 7결씩 추가로 지급), 소로역 각 5결(함경‧평안도의 소로역에는 3결씩 추가로 지급)로 한다.
② 역리의 인위전(人位田)으로는 장전 2결, 부장전(副長田) 1결 50부(負)를, 역노(驛奴)의 인위전으로는 급주전(急走田) 50부씩을 지급(긴요한 역에는 급주전 50부를 추가로 지급)한다.
③ 역마(驛馬)의 사육용 재원인 마위전(馬位田)으로는 대마(大馬)에 7결, 중마(中馬)에 5결 50부, 소마(小馬)에 4결씩을 지급(긴요한 역로의 대마에는 1결씩, 중‧소마에는 각 50부씩 추가로 지급)한다.
④ 역둔전(驛屯田)으로 각 역에 12결씩 지급한다.
이상의 여러 지목(地目) 가운데에서 역둔전과 마위전은 공유지로서 각기 해당 역과 그 입마(立馬) 담당자가 직접 경작해 거두어들이고 국가에 세를 내지 않는 이른바 자경무세지(自耕無稅地)의 토지였다. 공수전‧장전‧부장전‧급주전은 민전(民田) 위에 수세권(收稅權)이 설정된 것으로, 국가에 납입될 세(稅)를 각기 해당 역‧역장‧부역장‧급주자에게 지급하는 각자 수세지(各自收稅地)였다. 『경국대전』에 등재된 전국 역의 수가 540개이며 소로역이라도 대마 2필, 소마 2필의 말이 비치되도록 하였으므로 전체 역전의 규모는 작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역전 가운데 마위전의 감소가 특히 문제시되었다. 공수전은 위전 경작자로부터 전세(田稅) 혹은 대동(大同)을 수취하거나 공수위미(公須位米)의 명목을 거두는 방식이 유지되었다. 마위전은 입마 담당자가 스스로 경작하는 토지였으나 규정이 준수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마위전이 설정되면서 입마와 관계없는 사람이 경작하는 병작의 방식이 취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된 역(役)으로 인해 입마를 맡은 마호(馬戶)가 함부로 토지를 매매하여 토호가 점유하거나 궁방에서 절수(折受)하기도 했다.
국가에서는 마위전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매매와 점유 행위를 규제하고자 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서는 마위전을 비롯한 역위전(驛位田)을 몰래 매매하거나 넓게 점유하는 행위를 엄하게 금지하고 황폐된 역위전을 폐사전(廢寺田)‧속공전(屬公田)으로 보충하여 지급해 줄 것을 규정하였다. 마위전을 보충하기 위해 지역민들이 서로 의논하여 마위전을 매득하거나 찰방(察訪)이 마위전을 매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마위전이 일반 민전(民田)에 섞여 들어가거나 토호 사족들에 의해 점유되는 현상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마호에 대한 전결급복(田結給復)은 마위전이 유명무실해진 데 따른 결과였다. 역마를 기르는 비용과 역(役)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공하기 위해 복호전(復戶田)을 지급한 것이다. 자신의 토지가 있는 경우 대동세를 면제해 주고 자신의 토지가 없는 경우 관에서 대동세를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립(雇立)이 일반화되는 추세에 따라 역리‧역졸들에게도 장전‧부장전‧급주전 이외에 복호전이 지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