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전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및 조선에서, 지방 관청에 소요되는 경비를 위해 주(州) · 현(縣) · 향(鄕) · 부곡(部曲) · 역(驛) · 관(館) 등에 지급한 토지.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고려 전기
공포 시기
고려 전기
시행 시기
고려시대|조선시대
시행처
고려왕조|조선왕조
주관 부서
고려 상서성 호부|조선 호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공수전은 고려 및 조선에서 지방 관청에 소요되는 경비를 위해 주(州)·현(縣)·향(鄕)·부곡(部曲)·역(驛)·관(館) 등에 지급한 토지이다. 공수전 경작을 통해 마련한 재원은 지방 관청과 기관의 소요 경비에 사용하였다. 고려에서는 외관의 녹봉, 빈객 접대 및 기타 경비에 사용하였고, 땔감을 마련할 수 있는 공수시지 역시 지급되었다. 조선에서는 공수전 외에 아록전이라는 별도의 토지를 두어 외관 녹봉을 충당하였다.

정의
고려 및 조선에서, 지방 관청에 소요되는 경비를 위해 주(州) · 현(縣) · 향(鄕) · 부곡(部曲) · 역(驛) · 관(館) 등에 지급한 토지.
제정 목적

중앙 및 지방의 각급 관청, 즉 공해(公廨)에 소요되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마련된 토지를 공해전(公廨田)이라고 부른다. 공해전은 공수전(公須田) · 지전(紙田) · 장전(長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가운데 공수전은 지방 관청의 빈객 접대와 기타 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인 동시에 외관(外官)의 녹봉(祿俸)도 조달하였다.

내용

고려시대 공수전의 지급 상황은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 전제(田制) 공해전시조(公廨田柴條)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표 1〉과 같다.

(1) 주 · 현 공수전(단위: 결)
등급 공수전
1,000정 이상 300
500정 이상 150
200정 이상 (?)
100정 이상 70
100정 이하 60
60정 이상 40
30정 이상 20
20정 이하 10
(2) 향 · 부곡 공수전
등급 공수전
1,000정 이상 20
100정 이상 15
50정 이하 10
(3) 관 · 역 공수전
등급 공수전
대로역 60
중로역 40
소로역 20
대로관 5
중로관 4
소로관 3
〈표 1〉 공수전의 지급 규정

공수전은 지방 관청 · 기관의 등급에 따라 차등 있게 배정되었다. 등급을 구분하는 기준은 정(丁)의 다과(多寡)에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인정(人丁)이나 전정(田丁) 혹은 호(戶)로 비정하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또한 관(館) · 역(驛)을 대 · 중 · 소로 구분한 것은 관 · 역이 맡는 역무(役務) 부담의 크고 작은 것에 따른 것이다.

공수전은 국가의 공유지인 관전(官田) 위에 설정되어 지방 관청에 예속된 관노비(官奴婢)의 노동력을 비롯하여 주변 농민들의 요역(徭役) 노동에 의해 경작되거나, 농민을 이용한 소작제(小作制) 경영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공수전의 수입은 관아 경영에 필요한 일반적 경비에 충당되었다. 예컨대 빈객의 접대 등 기타 용도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외관의 녹봉으로 지급하였는데, 녹봉의 절반은 공수전 수입으로 나머지 절반은 좌창(左倉: 광흥창(廣興倉))에서 지급되었다. 또한 공수전만으로 운영비 조달이 부족해지자 1099년(숙종 4)에는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에 둔전(屯田)을 두어 보충하도록 하였다.

조선 왕조에서도 지방 관청의 경비를 위해 · 목(牧) · 도호부(都護府) · · · 역에 공수전을 지급하였다. 조선 초기 중앙 관청의 재정은 대략 국고에서 수납하는 조세와 기타의 공납(貢納)에 의존하였다. 반면 지방 관청의 경우 토지를 해당 관청에 지급해 이 토지 재원에서 나오는 소출을 운영 경비에 충당하는 방법이 기본적인 형태였다.

지방 관청의 경비 조달을 목적으로 설정된 토지는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田) 제전 조(諸田條)를 보면, 아록전(衙祿田) · 공수전 · 유역인전(有役人田) · 마전(馬田)관둔전(官屯田) 등이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록전과 공수전(이 둘을 합쳐 늠전(廩田)이라 함)이었다.

아록전은 외관 녹봉의 재원이 되는 토지였고, 공수전은 지방 관청에서 빈객의 접대와 기타의 잡종 경비인 용지(用紙) · 유밀(油蜜) · 포진(鋪陳) · 약재(藥材) · 등유(燈油) · 시거탄(柴炬炭: 땔나무 · 횃불 · 숯) 등의 재원이 되는 토지였다. 고려에서는 공수전을 통해 외관의 녹봉을 지급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별도로 아록전을 두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경국대전』 호전 제전 조에 의거, 각 지방 관청 및 기관에 지급된 공수전의 액수는 〈표 2〉와 같다.

관청 대로 중로 소로
부 · 목 · 대도호부 25 20 15
도호부 25 20 15
25 20 15
25 20 15
┌황해도 45
역├양 계 30 22 8
└기타 20 15 5
〈표 2〉 공수전 지급액수(단위: 결)

변천 사항

조선의 공수전 · 아록전은 고려의 주 · 현 공해전의 후신으로 볼 수 있으며, 과전법(科田法)에서는 옛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가감이 있다가, 1445년(세종 27)의 개혁에서 주 · 현 역로의 규모에 따라 지급 액수가 결정되었다. [표 2]에 보이는 것은 그 후 다시 개정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1445년 개혁 당시의 결수보다 다소 감소되었다.

공수전의 지급 액수를 군 · 현의 규모에 따라 차이를 둔 것은 지방 교통량의 다소(多少), 내왕하는 빈객 수의 다소 등을 참작한 결과였다. 이때의 전국 공수전의 총 결수는 5천 결 미만이었다(대로 24개읍 6백 결, 중로 75개읍 1,500결, 소로 166개읍 2,490결, 합계 4,590결). 16세기로 넘어오면서 공수전은 아록전과 함께 유명무실해지고 양란(兩亂) 이후에는 규정상 지급해야 할 명목에 따라 일정 액수의 쌀(米)로 지급되었다. 토지 분급제하의 지목(地目)으로서 공수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의의 및 평가

공수전은 고려와 조선에서 지방 관청에 지급된 토지로 관아 운영의 주요 재원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를 통해 일반적인 소요 경비 이외에 외관의 녹봉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외관 녹봉을 부담하는 아록전을 별도로 두었다. 또한 고려에서는 공수전 이외에 공수시지(公須柴地: 시지는 땔감 등을 마련할 수 있는 산판(山坂))가 주현과 역에 지급되었음에 반해 조선에서는 시지 지급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급된 토지의 경작을 통해서 경비를 마련하는 방식이나 둔전 경영을 통해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는 것은 유사하였다. 하지만 과전법과 직전법(職田法)을 거쳐 토지 분급제가 소멸하게 되면서 공수전 지급을 통한 재정 운영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고려대학교출판부, 1980)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일조각, 1979)
안병우, 『고려전기의 재정구조』(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이경식, 『한국 중세 토지제도사: 조선전기』(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장우, 『조선초기 전세제도와 국가재정』(일조각, 1998)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14(탐구당, 200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24(탐구당, 1994)

논문

안병우, 「고려말·조선초의 공해전: 재정의 구조·운영과 관련하여」(『국사관논총』 5, 국사편찬위원회, 1989)
안병우, 「고려전기 지방관아 공해전의 설치와 운영」(『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