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둔전(屯田)은 설치 목적에 따라 크게 군둔전, 국둔전, 관둔전 등으로 구분된다. 군둔전은 국경을 지키는 군인이 직접 경작해 군량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둔전을 뜻하며, 국둔전은 군량 확보에서 나아가 국가 재원 확보를 위한 둔전으로 민호를 통해 경작되기도 했다. 사료상에서 군둔전과 국둔전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 관둔전은 각 지방의 행정 기관이나 군사 기관에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 운영된 둔전이다.
관둔전은 고려시대 초기부터 주로 변경 지역에 위치하여 군사적 성격이 강한 행정 구역인 양계 지역(兩界地域)에 설치되어 국경을 지키던 병사인 진수군(鎭戍軍)이 직접 경작하는 토지였다. 이후 1099년(숙종 4)에 와서 주 · 부 · 군 · 현에 각기 5결(結)씩의 관둔전을 설치하여 경작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둔전 경작의 폐해를 고려해 개국 초에 폐지하였다. 그러나 태종 때부터 주인이 없는 토지인 공한전(空閑田)을 국가에 귀속시켜 관둔전을 다시 설치하였다.
1424년(세종 6)에는 각 주현의 관둔전으로 목(牧) 이상은 10결, 군(郡) 이상은 8결, 현(縣)에는 6결로 차등 있게 규정하고, 관노비에게 경작시켜 민간에 폐해가 없도록 하였다.
한편, 군사 기관의 둔전은 영전(營田)이라 하여 역시 태종 때부터 각 지방의 영(營) · 진(鎭) · 포(浦)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는데, 특히 하삼도(下三道)의 연변에 주로 설치되었다. 또 양계 지역에는 세종 때의 북방 개척에 따라 변경의 각 군사 단위를 중심으로 널리 설치되어 있었다.
세조 때에는 각 주현의 관둔전 규모를 두 배로 확대해 설정하였다. 또한 각 요충지마다 진관(鎭管)을 설치하여 진관을 중심으로 적을 방어하는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정립에 따라 종래에 난립하고 있던 둔전을 주진(主鎭) · 거진(巨鎭) · 제진(諸鎭)으로 나누어 전국적으로 정비하였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관둔전은, ① 행정 기관에 대한 주현 둔전으로 부 · 대도호부 · 목에는 각 20결, 도호부 · 군에는 각 16결, 현에는 각 12결로 규정하였다. ② 군사 기관인 각 진의 둔전으로서 주진에는 각 20결, 거진에는 각 10결, 제진에는 각 5결로 하였다. ③ 교통 기관인 역에는 역둔전으로 똑같이 12결로 설정하였다. ④ 규정된 액수 이외의 둔전 및 관아에 귀속된 속공전(屬公田)은 모두 빈민에게 주어서 일정한 세를 바치도록 하였다.
이상의 모든 관둔전은 해당 기관 소속의 인리(人吏) · 관노비 혹은 진수군만을 동원해 경작하게 하고, 수확물 전부를 그 기관에서 수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규정된 여러 둔전의 규모와 그 경영 방식은 16세기로 오면서 많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세력 있는 관인층(官人層)이 토지를 겸병하였고, 지주 전호제(地主佃戶制)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런 가운데 세력가의 청탁과 해당 기관의 수령 · 병사 · 수사 · 만호 등의 영합으로 행정 · 군사 기관의 관둔전이 크게 사유화되어 갔다. 이로 인해 해당 기관의 운용 경비가 부족해져 일반 국고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 관례화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속대전』을 보면 『경국대전』에서의 규정 액수가 그대로 유효한 것으로 되어 있고, 대동법의 시행 이후로도 관둔전은 그대로 존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후 중앙의 각 궁방 · 아문의 둔전 명목이 크게 확대되어 갔다. 이와 함께 각 지방의 감영 · 병영 · 수영에서도 각기의 둔전들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설치해 갔다. 그것은 곧 권력형 둔전의 확대 현상으로서 원래 규정된 관둔전은 아니었다.
각종 명목의 둔전이 확대되면서 법전에 규정된 관둔전의 규모는 크게 감소되었는데, 정해진 규모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난립하는 둔전을 규제하고, 본래의 관둔전을 유지하려는 방안을 강구했지만 관둔전의 감소를 막지는 못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관둔전은 군사에 의해 직영되던 전기와 달리 군현의 사정에 따라 여러 형태로 운영되었다.
관아의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관속들이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입역(立役)의 대가로 경작하게 했으며, 특히 관내 민인을 동원하여 경작하도록 하는 방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인의 반발이 계속되자 점차 인근의 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한 뒤 소출을 거두는 병작제가 확산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