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둔전(軍屯田)은 고려 초기에 영토 확장과 관련해 양계(兩界) 지방에서 국경을 지키는 군사인 방수군(防戍軍)의 힘으로 확보되기 시작하여 경작되었다. 그러나 중기에 백성을 입주시키면서부터는 일반 주민의 둔전군(屯田軍)에 의한 경작으로 경영 방식이 바뀌었다. 그 관리도 초기에는 각 진(鎭)의 군장(軍將)들이 맡았으나, 중기 이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그들이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초기에는 둔전사(屯田司)가 따로 있어 농우 · 종자 · 농기구 등을 보유 · 관리하였으나, 둔전군에 의한 경영으로 바뀌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둔전군에 의한 경영은 일정량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생산물 중 일정한 액수의 지대(地代)를 거두는 형태였다. 군둔전은 소유 형태로 볼 때 국가 공유지로서 국둔전(國屯田)과 거의 동일시되었다. 반면 각 관의 경비 보조를 위해 이들 기관의 소유지로 확보되는 관둔전(官屯田)과는 성격이 다르다. 군둔전 혹은 국둔전이 국가 재정 및 군량 보충을 위한 토지였다면 관둔전은 지방 재정 보충을 위해 마련된 토지였다.
공민왕 때부터 왜구 방어를 목적으로 연안 주군(州郡)에 다수 설치된 둔전도 일종의 군둔전으로, 흔히 포둔전(浦屯田) · 진둔전(鎭屯田)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2년(태조 즉위년)에 둔전 경영의 본래의 뜻과는 달리 일반 농민의 동원으로 운영된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대부분의 둔전이 폐지될 때 군둔전도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1394년에 군자(軍資)의 확보를 목적으로 군둔전은 다시 부활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관둔전이 폐지될 때도 비슷한 이유로 모두 폐지되었다가 곧 복구되었다. 그 뒤 1460년(세조 6)에는 관둔전의 예에 따라 규모가 제한되었다. 그 결과 절제사영(節制使營) · 처치사영(處置使營)은 20결, 첨절제사영(僉節制使營) · 도만호영(都萬戶營)은 15결, 만호영은 10결을 상한으로 하였다. 그러나 곧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완비되면서 대부분의 외방 군직을 행정관인 수령들이 겸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둔전도 관둔전 체제로 흡수되어 『경국대전』에 주진(主鎭) 20결, 거진(巨鎭) 10결, 제진(諸鎭) 5결로 각각 규정되었다. 이후 군둔전을 포함한 국둔전, 관둔전 등의 둔전은 경영의 불안정과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점차 소멸되어 갔다.
둔전의 복구는 양란 이후 황폐화된 토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둔전의 설치는 전쟁으로 발생한 대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민(流民)을 안집시키는 적절한 방안으로 대두되었다. 정부는 중앙의 군문 및 아문은 물론 지방의 각 감영, 병영, 수영 등에도 둔전의 설치를 장려하였다. 그로 인해 17세기에는 개간이나 매득 등을 통해 둔전이 확대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둔전의 운영 방식도 다양해졌다.
조선 후기 둔전의 운영 방식으로는 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군인 및 노비 등 신역(身役) 부담자를 동원해 경작하는 형태가 있었으며, 인근의 농민을 징발하여 경작에 투입하는 방식이 있었다. 또한 전란으로 인해 거주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민을 모집하여 경작하는 형태도 존재했다. 이러한 형태의 둔전은 17세기에 추진된 국방강화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황해 일대와 서남해 연안, 북부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그러나 부역 노동에 의존한 둔전 경영은 낮은 생산성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부역제에 따른 둔전 경작은 자신들의 농토를 경작할 시간과 노력을 강제로 빼앗기기 때문에 생산성이 저조하게 나타났다. 또한 당시 둔전은 황무지를 개간한 경우가 많아 경작 조건이 열악했다. 게다가 각종 신역의 물납화가 가속화되면서 중앙의 군문 및 아문, 지방의 감영, 진 등에서는 둔전을 경작할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각 기관에서는 안정적인 둔전 운영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이때 둔전 경영에 투입되는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안정적으로 경영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으로 병작제가 채택되었다. 군졸의 확보나 유민 모집이 어려워지는 추세에서 일반 민인들에게 병작을 주어 경영하는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일반 농민에게 둔전을 경작하게 하고 소출의 일부를 거두는 방식으로 인신적 지배 예속 관계를 탈각해 나간 경영 형태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